중세 유럽에서 농부들은 영주의 횡포에 대항할 수단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들은 밭에서 거둔 수확물을 나막신을 신은 발로 밟는 방법으로 영주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나막신은 프랑스어로 ‘사보’이다. 노동쟁의 중에 기계나 원료를 고의로 파손시키는 행위를 일컫는 ‘사보타지’는 여기서 유래됐다.
사보타지는 우리말로 흔히 ‘태업’이라 번역되지만 태업은 사보타지의 일부분일 뿐이다. 태업은 형식적으로 일하는 척 하면서도 작업능률을 저하시키는 방식으로 항의하는 쟁의수단이다. 노동운동에서 자주 사용되는 소극적 방식의 사보타지이다.
14기 LA지역 평통 위원들은 얼마전 한 평통 위원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이메일은 14기 평통 회장 하마평에 올랐다가 탈락한 인사가 보낸 것이었다. 그는 평통 인선의 부당성을 길게 성토한 뒤 위원들에게 경종을 촉구하기 위한 제안을 덧붙였다.
제안이란 “평통 위원들이 한마음으로 2년 동안 활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 방식으로 조직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한인단체들은 행사에 평통 회장을 초청하지 않음으로써 ‘이등 시민’으로 밀린 한인들의 위상을 되찾자”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평통 위원들에게 소극적 사보타지를 하자고 선동하는 내용이었다.
몇 번을 되씹어 봐도 어처구니없는 이런 해프닝은 평통의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선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기가 회장 하겠다고 나섰던 단체를 상대로 한 사보타지를 촉구하고 나선 행위는 비판을 피해 가기 힘들다. 회장 물망에 올랐던 정도의 인사라면 최소한의 분별력은 지니고 있어야 할 터인데 그런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불만의 내용에는 귀를 기울일 만한 부분이 있다. 이번 14기 평통은 인선 잡음이 많았다. 특히 미주 각 지역에서는 회장 인선을 둘러 싼 낙하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권력과의 친소관계에 의해 인선이 이뤄진 인상이 짙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새로운 회장에 의해 임명된 임원진 명단을 보면 실소가 나온다. 불과 2년 전 영사관을 상대로 거친 항의를 하며 “해외 평통을 해체하라”고 소리 높여 외쳤던 인사가 버젓이 주요 임원직을 꿰차고 앉았다. 어느 코미디언의 유행어였던 “그때그때 달라요”가 떠오른다. 당사자는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서로 자기가 옳다면서 다투지만 요모조모 아무리 살펴봐도 오십보 백보이다. 그러니 평통에 대해 70% 이상의 한인들이 부정적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평통은 남북통일을 한걸음 앞당긴다는 취지로 해외한인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만든 기구다. 그런데 남북통일을 위한 기여는커녕 한인사회 분열의 단초만 제공하고 있으니 무용론이 갈수록 확산될 수밖에 없다.
평통이 제자리를 찾으려면 분명한 자기의식을 갖춘 인사들이 한층 더 많아져야 한다. 자기가 주류일 때는 ‘평통 효용론’을 내우다가 비주류로 밀리거나 탈락하면 ‘평통 무용론’을 외치는 기회주의가 판치는 한 평통이 제자리를 찾고 기능하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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