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청소년회관 (2)
커뮤니티로 눈을 돌리다
82년 독립, 한인사회 재정후원 한마음
1979년 5월8일 타운인근 한 봉제업체에서 쉴 틈도 없이 미싱 일에 매달리던 어머니들은 뜻밖의 손님들을 맞이했다. 자식들이었다. 미국 땅이라 생각도, 기대도 못했건만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어머님 은혜’를 불러주는 자식들을 보면서 “어느새 저렇게 부쩍 컸구나”하는 생각에 절로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눈물을 흘리기는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일찍 도시락을 들고 나간 어머니가 좁은 공장안에서 가느다란 실을 미싱 바늘에 꿰고, 페달을 밟는 모습을 처음 접하며 자신들을 위해 얼마나 힘든 일을 하고 계신지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날 행사는 한인청소년 회관이 건강한 가족을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1.5세 제인 김 관장 초석
사업확대·재정확보 박차
자체건물 마련 기금 조성
한인청소년 회관이 AADAP (Asian American Drug Abuse Program)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을 결정하게 된 배경에는 한인사회의 현실에 맞는 운영 필요성이 내부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사회적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역할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관계자들 사이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이와 함께 1975년 처음 한인청소년 회관이 운영되기 시작한 이후 일부 학부모들 사이에서 ‘마약방지 및 예방’이란 구호에 부정적인 인식이 커지며 근본 목적이 왜곡되는 것도 부담이었다.
청소년 회관의 독립을 놓고 약간의 이견이 있었지만 AADAP는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론 와카바야시, 패트릭 오가와 등 AADAP 관계자 및 케네스 한 LA카운티 수퍼바이저 위원의 보좌관이었던 마스 후카이(별세), 레슬리 김(현재 샌프란시스코에서 소셜워커로 활동) 등이 많은 도움을 제공했다.
마침내 1982년 8월20일 독자적인 비영리기관으로 독립한 청소년 회관은 제인 김씨를 관장으로 임명하고 이 때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한다.
김 관장은 1977년 UCLA를 졸업하자마자 AADAP에 풀타임 직원으로 월 670달러라는 작은 돈을 받으며 일을 시작했다.
1968년 14세 때 부모를 따라 이민와 포모나에서 성장한 김 관장은 자신이 겪었던 사춘기 시절의 경험과 대학재학 시절 각종 봉사활동을 하며 한인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갱단과 직접 접촉하고, 어려운 한인학생들을 상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관장에 오른 그녀는 곧바로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독립기관에 걸맞는 재정확보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청소년 프로그램에서는 카운슬링을 비롯해 농구대회, 그리고 직접 학교를 방문해 이중언어 상담프로그램 등을 진행했다. 또 부부세미나 등을 개최하며 건강한 한인사회 만들기에 앞장섰다.
특히 LA 시의 재정지원을 받아 고등학생이 초등학교 학생들의 학업을 돕는 SYETP(Summer Youth Employment Training Program)을 진행,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이와 함께 한인타운 미화작업의 일환으로 낙서지우기 운동을 펼치고, 고용 및 취업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등 사회적 문제까지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다.
펀드조성 사업도 활기차게 진행됐다. 1983년 자니 윤씨를 초청, 첫 기금마련 행사를 열어 8만달러라는 당시로는 꽤 큰 돈을 모으는 데 성공을 거뒀다.
물론 그 뒤에서는 1.5-2세 단체육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본보 장재민 회장을 비롯해 유의영 칼스테이트LA 교수, 선우 국, 김인환, 민병수 변호사, 사라 김, 임동욱씨 등 이사회, 그리고 황광한 당시 LA총영사 등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행사는 이후 연례행사로 자리잡으며 한인사회 기금조성 문화 정착에 한 몫을 하게 된다.
제인 김 전 관장은 “당시 재정확보가 무엇보다 시급한 현안이었다”고 회고하면서 “유나이티드 웨이와 아코 재단 등 주류사회로부터 지원금을 이끌어내기 시작했지만 안정적이지 못해 결국 한인사회에서 나오는 펀드가 매우 중요했다”고 말했다.
재정마련을 이같은 노력들은 1985년 캘리포니아 정신건강국(CDMH)으로부터 10만달러라는 큰 지원금을 받아내며, 향후 정부기금 확보에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김 관장이 정부 돈을 따내는 과정에서 남편 데이빗 김 변호사(두 사람은 1979년 AADAP에서 만나 결혼)는 제안서를 만드는데 많은 도움을 제공했다.
이 당시 청소년 회관에서 활동했던 인사로는 토니 김(현재 변호사), 찰스 김 전 KAC 전국 사무총장, 김영빈, 박진영, 벤자민 허, 애니 조, 샘 리, 미선 조씨 등이 있으며, 이들은 훗날 각기 다른 방면에서 활동하며 한인사회 발전에 공헌했다.
특히 1985년 7월부터는 UCLA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던 송정호씨(현재 관장)가 근무를 시작했다.
1986년 청소년 회관은 중요한 사업에 손을 댄다. 셋방살이에서 자체 건물마련에 나선 것이다. 이는 사업확장 및 이에 필요한 공간확보를 위한 현안이기도 했다.
그 해 5월15일 김기순씨를 위원장으로 한 건립위원회가 설치된다. 여기에는 김 위원장과 김 관장, 최계옥씨, 최태호씨, 김인환씨, 선우국씨 등이 참여했다.
88년까지 활동한 건립위는 모금활동에 총력을 기울인 끝에 1988년 6월15일 윌튼과 잉그래햄에 위치해 있던 침실 4개짜리 낡은 주택을 39만달러에 매입(17만7,000달러 다운)했다.
6년 뒤인 1994년 이 건물은 헐리고 저소득층을 위한 주거 공간과 사무실이 혼합된 4층짜리 새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KYCC 회관이며, 이 단체가 오늘의 모습을 갖추는 시작이었다.
현재 이곳에서는 청소년 회관의 애프터 스쿨 프로그램과 유스(Youth) 프로그램, 정신건강 프로그램 등이 이루어 지고 있다.
김 관장은 1988년 2월 셋째 아이를 가지면서 자리에서 물러났다.
한인청소년 회관은 그 후임으로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에서 저소득층 주택지원 활동을 벌이던 김봉환씨를 새 관장으로 맞이하게 된다.
김 관장이 근무했던 80년대 청소년 회관은 청소년 탈선 방지 및 마약 예방이란 작은 틀에서 벗어나 한인사회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시기였으며, 이를 통해 얻은 경험과 능력은 훗날 한인사회는 물론 타인종까지 끌어 안을 수 있는 배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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