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자들이 전문 사진기로 사진을 찍으면 플래시도 터지고 셔터 소리도 나서 멋있지만 일반기자들은 ‘똑딱이’ 사진기로 사진을 찍는다. 볼품없는 일반 사진기가 사진을 찍을 때 ‘똑딱’하고 소리를 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똑딱이’가 진가를 발휘하는 때가 12월이다. 연말을 맞아 송년회가 하루에도 수십 개씩 열리기 때문에 12월에는 일반기자들이 ‘똑딱이’를 들고 ‘송년회 특별취재’에 총동원되기 때문이다.
워터게이트 버금가는 정치적 음모나 경천동지할 사건의 취재를 꿈꾸며 언론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면 송년회를 찾아다니며 ‘똑딱이’로 사진을 찍어야 하는 현실에 괴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호텔 예약 일정을 ‘입수’해 송년회를 찾아가면 “아가씨 누구 찾아왔어요? 사람들이 다 안 모였으니 30분 후에 다시 오세요.”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솔직히 ‘언론인’의 스타일이 구겨지는 순간이다.
지난 일요일 오후, 6시까지 당직을 하고 송년회 취재를 갔다. 몸이 피곤하니 그다지 적극적이지 못한 자세로 한 지방도시 향우회의 송년회를 찾았다. 불쑥 찾아와 인사를 하는 기자를 보고 의아해 하는 향우회 관계자에게 단체사진을 찍어 송년회면에 실으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난 그는 갑자기 마이크를 잡더니 “한국일보 기자님이 우리 향우회를 취재하러 오셨습니다. 사진을 찍어야 하니 모두 모여주세요”라고 ‘발표’하셨다.
그때부터 화장실에 간 전직 회장을 부르러 가고 아이들을 일렬로 세우고 벗어 놨던 양복 윗저고리를 입고 화장을 고치느라 회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향우회 회원들의 적극적인 자세에 초라한 똑딱이 사진기를 꺼내놓기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향우회 회원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치며 사진을 찍었다.
저녁을 먹고 가라는 권유를 뒤로하고 나오는데 관계자가 따라 나오며 “장기자랑 상품인데 선물로 가져가라”며 작은 상자를 건네주었다. 거절에 거절을 거듭한 끝에 받아서 나온 ‘뇌물’은 6개 들이 비누 세트. 어린 시절 시골의 친척집에 놀러갔다 돌아올 때 느껴지는 훈훈함이 상큼한 비누 냄새처럼 가슴에 퍼졌다.
언론계의 대선배인 이경원 선생이 지역 신문의 사명에 대해서 논하며 이런 말을 해주셨다. 20세기 초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미국에 온 수많은 중국인들이 허리가 휘어지는 고생을 하다가 흔적도 없이 숨져 갔다. 그들이 미국 땅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는 이들이 사망했을 때 지역 신문에 실린 한두 줄짜리 부고라는 것이다. 이 선생은 힘겨운 이민 생활을 꾸려가는 우리 이웃들의 삶의 이야기 하나 하나가 취재거리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향우회에서 만난 정겨운 이웃들이 우리 신문에 자신들의 얼굴이 실린 것을 보고 잠시나마 웃음을 지었길 바란다. 기자인 내가 기억해야 할 얼굴은 1면에 커다랗게 실린 프래시 세례를 받는 한국 대통령 당선자의 얼굴이 아니라 똑딱이로 찍은 단체사진 속의 작지만 소중한 얼굴들이기 때문이다.
김연신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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