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 60주년을 맞아 남과 북의 정권이 함께 회갑잔치를 요란하게 벌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 민족 스스로의 지혜와 힘이 아닌 연합국의 도움으로 이룬 해방이었기에 그들의 결정에 따라 분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음을 뼈아프게 생각한다. 이 인위적인 분단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엄청난 고통을 치러야 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1894년5월 전봉준이 일으킨 동학란을 조선 정부가 진압할 능력이 없어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한 것이 화근이 되어 청일전쟁이 일어나 한반도는 대륙 침략의 발판이 되었다.
러시아는 일본의 대륙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1904년 2월 선전포고 없이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전함으로써 일본이 한반도와 요동 반도를 수중에 넣었다. 이러한 와중에 국내에서는 1895년 2월11일 고종이 일본군을 피해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권 사건이 있었고, 10월8일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는 을미사변이 있었다.
1910년 8월29일 한일 합방조약이 공포됨으로써 일제가 한국의 통치권을 탈취하고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항복하기까지 36년 동안 온갖 탄압과 수탈을 당하며 민족말살의 직전까지 갔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읊으며 속앓이만 하다가 타인에 의해 해방이 되었다. 힘이 없으면 지혜나 있지 친중, 친러, 친일로 갈려왔다 갔다 하다가 일제에 잡아 먹혔는데 자숙한 일이지 자축할 일인가.
1919년 4월17일 대한제국의 망국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를 설립했다. 그러나 영토도 없고 재정도 없어 파란과 곡절만이 계속되는 이름만의 임시정부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내에서 사상적인 분열과 파란이 심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정황들은 결국 임시 정부가 연합국의 인정을 못 받고 해방직후 정권을 승계하지 못했으며, 광복군과 독립군 역시 연합군에 소속되지 못해 전승군으로서 서울에 입성 못하고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진주하여 국토와 민족 분단의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42년 5월 C. 헐 미 국무장관은 “한국 임시 정부의 승인 거부 이유는 한국 독립을 위해 활약하고 있는 단체들이 통일되어 있지 못하고,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단체들이 한국에 있는 주민들과 연관을 별로 맺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며 주중 미대사에게 보낸 외교문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한국은 역사가 증명했듯이 자위능력이 결여했을 때 외세의 침입 또는 간섭을 유발하여 극동의 평화를 위협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이러한 외세의 야욕이나 간섭을 이겨갈 수 있도록 자치능력이 길러져야 한다는 것이 당시 미국 정부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조에서 1943년 11월 카이로 미, 영, 중 회담에서 한국은 40년간 민주정치 연수를 위해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했다가, 1945년 회담에서 신탁 통치기간이 5년으로 단축된 바 있다.
이러한 것들이 국제사회가 우리 민족을 보는 시각임을 인지하고 해방60주년을 맞이하여 지금은 자위능력과 자치능력이 있는가를 냉정하게 자성했으면 한다.
박종식 예비역 육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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