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고
▶ 고세곤/메릴랜드 거주 .전 구국향군 부사령관
반정부 세력이 지도자 없이 산발적으로 투쟁할 때 1972년 12월 일본 동경에 신병치료차 나왔던 김대중은 유신 선포를 듣고 본국으로 귀국을 포기하고 워싱턴 처남집에 유했다. 지도자를 기다리던 반정부 민주인사들은 활기를 찾게 되고 그를 구심점으로 결집할 수 있었다. 허물어진 미주재단을 재건하고 워싱턴의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김대중을 초대 의장으로 선출했다. 한민통 총회에선 50며의 민주인사가 참여하여 한민통의 규약과 헌장을 준수하는데 동의했다. 지도위원은 임창영, 김상돈, 전규홍, 최석남, 이재현이었고 의장 비서실장으로 이근팔을 임명했다.
그로부터 25년간 민주화를 위해 궂은 일부터 미국 국회 교섭까지 맡았다. 발기위원으로 유기흥(작고), 강영채, 고재곤, 김응창, 최동원, 장석남, 신대식, 정기용, 고세곤, 이주성(작고), 박문규, 홍성빈, 부성래, 동원모(달라스), 임병규(뉴욕), 김장오(보스턴), 최명상(시카고), 여성으로 문명자, 방숙자였다.
당일 총회장에서 임창영 박사는 동지애를 발휘하여 북한 방문초청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김대중과 임창영은 일본 동경에서 열리는 재일 한민통 총회 참석차 떠났다.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다. 소위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다. 워싱턴은 즉각 ‘김대중 구출위원회’를 만들어 워싱턴 DC 16가에 모여 차량데모로 대사관의 공작정치 중단을 요구했다.
1973년 8월15일 유신 설득사절단으로 여야 중진으로 구성하여 25명이 왔고 코네티컷 애비뉴 Shorehm Hotel에서 환연 연회를 초호화판으로 진행했다. 친정부 일색으로 그중에는 교회 목사도 끼어 있었다. 그들은 꿀먹은 벙어리였다. 박준규, 신현확은 유신 선전으로, 정해영은 유신 지지로 연설했다. 우리는 분노했다. 그리고 격돌했다. 실력대결장으로 변하고 고성과 폭언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공화당은 큰 충격을 받았고 워싱턴에 와서는 숨어 있다 가곤 했다. 그 당시 고재곤, 장석남, 신대식, 고세곤, 정기용은 온 힘을 다해 항쟁한 사람들이었다.
1973년 12월 7일 주일 오후 유신 반대 데모로 워싱턴 DC의 듀폰 서클에는 200여 명의 교포가 나왔고 데모대는 대사관을 향해 행진해 나갔다. 대회는 김웅수 장군의 지휘 아래 진행되었고 민주인사들은 고무되었다. 데모 대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가면을 벗지 않아서 데모 준비위원의 제지를 받았다. 대사관은 굳게 문이 닫혔고 그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이는 공관원의 직무유기다.
1974년 한민통은 변화를 맞았다. 한국 교계의 원로이시고 민주화운동의 지도자 김재준 목사를 의장으로 모셨다. 이렇게 새 힘을 불어넣고 활기찬 투쟁을 할 수 있었다. 또 문필가요 작가인 김재준 목사는 ‘제3일’을 발행하여 문서로도 투쟁해나갔다. 이 때 우리 동지들은 미국 감리교회의 도움으로 새 교회로 등록하고 남재현 전도사가 앞장섰다.
1974년 8월 주일, 함병춘 대사가 예배에 참석했다. 민주인사, 구속학생을 석방해달라는 우리의 요청을 거절하고 유신헌법을 강요했고 심지어 소련의 사하로프를 실정법 위반으로 매도하고 있었다. 우리는 분노했다. 폭발했다. 고성과 폭언이 교차하면서 친유신과 반정부의 실력 대결장이 되었다.
고세곤/메릴랜드 거주 .전 구국향군 부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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