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순득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산골 동네인 경상남도 본포 가래골은 글자 풀이로 하면 아름다운 고을이란 뜻이다. 아름다운 고을에서 아름다운 여인들이 태어나면서 장수촌이기도 하다. 앞으로는 두 팔로 낙동강을 품에 안고 자리잡은 이 동네의 등뒤에는 장백산맥 꼬리인 산 넘어 또 산인 첩첩이 산골이다.
모질게도 추운 섣달 어느날 오후 골짜기에 가서 빨래해오라는 형님(동서)의 부탁을 받았다. 큰 자배기에 이미 물에 주물러 놓은 젖은 빨래거리를 머리 위에 꽉 얹어주면서 갔다오란다. 똬리도 없이 맨살에 올라앉은 젖은 빨래더미 자배기가 어찌나 뚱딴지 같이 무거운지 고개를 앞뒤로 흔들거리게 한다. 내 머리에 얹힌 자배기는 남의 속도 모르고 냅다 눌러 제키니 눈알이 튀어나오는 것 같다. 내 머리 정수리는 별나게 뾰족해서 구멍 뚫린 똬리가 꼭 필요하다.
“형님, 빨래 비누 주셔야지예” “이 사람아, 빨래비누 필요 없다. 빨래비누가 어디 있나, 없다”
옷들이 전부 광목이나 무명으로 돼 있어 속바지 하나가 내 한아름이나 된다. 흔히 우리들이 입는 팬티 같이 가벼운 것은 하나도 없고 빨래거리 하나가 뻣뻣하고 무겁다. 그나마 산꼭대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은 얼음같이 찬데.
“어머나…”
졸졸졸 어서와요 아가씨 졸졸졸 도랑물이 날보고 졸졸이 말로 애교있게 인사한다. 빛을 받아 반짝반짝 반짝이며 반갑단다. 생글 생글 웃으며 흐르는 것 같기도 하다.
“세상에 어쩌면 이렇게도 맑고 깨끗할까”
흐르고 있으니 얼 틈이 없다 뿐인데 그대로 도랑 가장자리에는 약간 언 얼음들이 보인다. 원래 손빨래하기 좋아하는 내 성질인데 산에서 깨끗하게 흐르는 도랑물에 빨래하기란 내 평생에 처음이며 내가 자원해서라도 하고 싶은 일이 아닌가.
반가운 친구 만나는 것 만큼이나 신바람 나는 작업이다.
심심 산골에서 흐르는 도랑물에 빨래방망이로 빨래하는 여인을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자. ‘모네’의 그림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 그의 그림에는 빨래하는 여인의 손에 방망이가 들려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넓적한 빨래방망이로 빨래를 마구 두들겨 패서 빨래비누 없이 옷에 붙은 때를 쫓아 내보내는 세탁방법은 이 지구상에서 우리 한국밖에 없는 참으로 경제적이며 슬기로운 우리 조상들의 빨래방법이다. 그런데 물이 너무 차다.
온 산골짜기에 빨래 방망이와 졸졸졸 흐르는 도랑물 소리며 밝고 맑은 햇빛까지 합하여 메아리 쳐 교향곡이 되어 울려 퍼지는데 도랑물 소리는 박자도 잘 맞게 반주를 해대니 이거 웬일이야 너무나 재미있는 신바람 나는 빨래하는 날이데이.
손가락이 빨갛게 얼어 아프지만 그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미있다. 시간 흐르는 거 잊어버린 지 한참 됐는데 우연히 저 산골 위로 올려다보니 무슨 수건 같은 것이 훨훨 날리는 것이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이상한 것이 골짜기에서 펄럭이니 갑자기 겁이 나서 빨래고 뭐고 급하게 헹구고 냅다 집으로 내려왔다. “내 다리야 날 살려라” 천방지축 빨래통 무거운거 잊어버린지 옛날이다.
“점 것들이 해 거름이 되면 올라가 굿을 한다”
헐떡이는 겁쟁이의 보고에 대한 형님의 대답이다. 점것들이란 말은 낙동강을 타고 부산에서 올라오는 뱃사람 상대로 장사하는 강가 사람들을 격하하는 말투다. 옛날부터 노동하는 사람들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은 ‘상놈’ 아니면 ‘점것들’이라고 불러 그들을 천시하고 노새 노새 또는 ‘과거’ 급제한 사람이나 ‘양반’만 대접하며 놀고 먹고사는 것을 추구하는 풍조 때문에 이웃 나라들로부터 훌쩍 뒤떨어지고 말았다.
이튿날 오후 빨래줄에서 빨래를 거두면서 보니 “이거 웬일이야 빨래가 백옥같이 희어졌네 빨래비누도 없이 빨래했는데 형님 말이 맞았구나” 신바람 나게 마구 두들겨 팼는데 그것들이 배겨내나? 못 견뎌서 서로 달아났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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