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태/시인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마시는 커피, 아침을 흠뻑 적시는 그 커피의 향보다도 나그네의 봄은 향이 진하다. 외로운 향이다. 이름으로 하나인 봄에, 산에는 만가지로 이름이 다른 초목들이 새싹으로 기쁜 얼굴을 내어 밀지만 이역의 우리에게는 단 한가지의 기쁜 소식이 없으니 봄이 와도 그저 외롭다 할 뿐 이다.
이 땅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나그네란 심정 때문이다. 봄기운에 들뜬 마음을 쓰다듬으며 봄바람을 만져보지만 친하게 보던 서울의 봄은 아니다. 그러니 기껏해야 워싱턴의 벚꽃구경 나들이로 봄 하나를 쓸쓸한 잔칫상에 올려놓는다. 마음이 아주 여리고 고운 여인의 입술처럼 가늘게 떨며 도시의 긴장 앞에 피어있는 벚꽃의 꽃잎파리를 보고 있으면 신선하게 들떠가던 기분이 다 사라지고 쓸쓸해진다.
꽃이란 저마다의 화려한 색깔을 마음을 다하여 풍기고 있으나 그 꽃을 한참 들여다보면 오히려 쓸쓸하다. 치렁치렁 늘어진 향도 아닌, 가냘픈 한 모금의 향기로 행인의 눈길을 끌며 겨우 겨우 유지하는 꽃들의 생명, 화려한 색깔로 얼굴을 화장하지 않으면 용도의 가치가 사라지고 팔려나가지도 않는 꽃들의 쓸쓸한 운명, 미국은 이민을 그렇게 규정을 해 놓고 웃고 있겠지.
한 동네가 지나가고 다음 동네가 다가오면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 새로운 동네의 이름이나 색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정경 때문에 지루한 줄 모르고 오히려 기뻐한다. 사실, 생활에 새로운 생활이 없듯이 새로운 것이 새로운 것이 아닌데도 그 앞을 스쳐 가는 사람에게는 앞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이 새롭게 느껴진다.
그런 맛에 여행을 가고 이민 길도 가겠지. 꿈보다는 절망이, 행복보다는 불행이, 기쁨보다는 서글픔이 더 많이 깔려있는 이민의 동서남북 길, 어느 방향을 잡고 가더라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의 이민 길 사람들은 불빛 하나를 바라보고 그 길을 간다. 밤을 지새워 밤바다의 항해 길을 밝히는 등대의 수고를 딛고 아침해는 떠오른다.
삶에서 오는 상처, 장사에서 오는 아쉬움, 노동에서 오는 고통, 절망에서 오는 고뇌들이 이민 길에 많았을 텐데 그런 것을 침묵 속에다 감추어두고 끊어지지 않는 끈 하나 끈질기게 잡고 가능성이란 희미한 기대 때문에 어디엔가로 꾸준히 가고 있는 사람들, 분홍의 봄이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눈인사도 없이 가기에 우리는 워싱턴의 벚꽃 핀 나무를 섭섭한 마음으로 찾아가는지도 모른다.
봄날 저녁에 노을이 진다. 여기 저기 노을의 조각이 흩어져 있다. 나는 그것을 발견하고 노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흐르는 강 위에 앉아 떠가는 저 노을 조각들, 하늘에만 하늘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빗물 고인 웅덩이마다 여기저기 놓여있는 조각의 하늘, 저녁때가 되어 나타나는 노을은 이름으로는 하나이나 색깔로는 여럿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색깔, 진분홍도 아니고 연분홍도 아닌 그 보다도 더 부드러운 색깔의 봄, 그렇기 때문에 상처가 감추어져 있는 봄에도 밤이 그 위에 앉고, 고요가 앉고, 별이 그 위에 앉는지도 모른다. 상처가 감추어져 있어도 분홍의 봄, 우리는 쉼 없이 이민 길을 가는 순례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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