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 속의 불가능이 있다. 불가능성 속의 가능이 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성 속의 가능이다. 사람이 죽는 것은 가능성 속의 불가능이다. 가능성은 열린 상태다. 불가능성은 닫친 상태다. 희망은 열린 상태다. 절망은 닫친 상태다. 가능성 속의 불가능은 열림의 닫침
이다. 불가능성 속의 가능은 닫침의 열림이다.
기독교의 부활 사상은 사람이 죽어도 영생을 얻는다. 불교의 윤회 사상은 사람이 죽어도 다시 태어난다. 영생은 이 땅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에서 이루어진다. 윤회는 다시 태어나도 인간이 아닌 다른 모양으로 나타난다. 종교가 추구하는 죽음에서의 또 다른 태어남은 불가능성 속의 가능을 낳게 한다. 닫침이 열림이 되는 희망을 안겨준다.
정 들면 헤어지기 힘들다. 정이 없으면 헤어져도 금방 잊게 된다. 정이란 고운 정도 있고 미운 정도 있다. 고운 정 미운 정 다 들은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사람은 가능성 속의 불가능을 보게 된다. 희망이 절망이 된다. 열림이 닫침이 된다. 닫침은 남은 사람을 슬프게 한다. 슬픔 속에서 망자(亡者)는 점점 잊혀져 간다. 가능성 속의 불가능이다.
망자를 돌아올게 할 수는 없다. ‘절대(絶對) 그리움’으로 남을 뿐이다. 절대 그리움은 불가능성 속의 가능으로 마음을 계속해 요동치게 한다. 망자는 볼 수 없다. 만날 수 없다. 보고싶을 뿐이다. 보고싶음은 가능성 속의 불가능이다. 망자를 만날 수 있는 길이 있다. 마음 안에서다. 불가능성 속의 가능이다.
9.11테러가 있은 지 2년이 갓 지났다. 3,000 여 명의 귀중한 목숨이 사라져 망자가 됐다. 그 3,000 여 명에 가족을 셋이라 하면 9,000 여 명이 된다. 보이지 않는 망자들을 가슴에 안은 남은 9,000 여 명은 지난 2년 동안 얼마나 아팠을까. 그 아픔은 오래도록 계속 될 것이다. 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가능성 속의 불가능이기 때문이다.
보고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은 망자 외에는 없다. 아무리 불러보아도, 그 부름은 하늘에 메아리쳐 울린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아내! 남편! 딸! 아들! 오빠! 형! 동생! 애인! 친구!를 애타게 불러봐도 만날 수 없는 그 보고싶음은 누가 가져다 준 것일까. 하늘 아래 함께 하며 볼 수만 있어도 좋으련만.
가능성 속의 불가능과 불가능성 속의 가능은 하나다. 태어남과 죽음은 하나다. 열림과 닫침도 하나다. 열림이 있음에 닫침이 있고 닫침이 있음에 열림이 있다. 태어남은 죽음을 전제한다. 죽음은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시간 공간의 흐름은 산자와 망자를 구분치 않는다. 지켜볼 뿐이다. 산자와 망자는 공간과 시간 속에 되풀이된다.
살아있는 자가 망자를 대신한다. 망자에 대한 ‘절대 그리움’은 살아있는 자의 ‘슬픈’ 몫이다. 남은 자, 살아있음에 그리워한다. 그리움 속에 불가능과 가능이 함께 해 열린 새로움을 낳는다. 망자의 몫을 산자가 해야 함이다. 산자만이 불가능과 가능을 하나로 할 수 있다. 불가능성 속에 가능을, 가능성 속에 불가능은 산자의 하기 여하에 따라 열린 희망이 된다.
망자는 죽은 것이 아니다. 사라짐이다. 보이지 않을 뿐이다. 망자는 살아있다.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내, 아들, 딸, 형, 오빠, 동생, 애인, 친구의 마음과 혼 속에 꿈틀대며 살아있다. 시간 공간을 초월해 영원히 살아있다. 불가능성 속의 가능이다. 가능과 불가능이 둘이 아닌 ‘서로’가 되는 계기다. 열린 희망이다.
그리움으로만 계속 남는 것, ‘절대 그리움’이다. 영원히 만져질 수 없는 영혼에의 그리움이다. 보고싶음에 몸과 마음이 촛불처럼, 타 들어가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에 대답 없는 망자지만, 하늘의 구름 되어 손짓한다. 그리고 부르짖는다. 땅이여/ 땅이여/ 테러 없는 땅이여/ 전쟁 없는 땅이여/ 사랑의 땅이어라
불가능성 속에 가능이 있다. 가능성 속에 불가능이 있다. 둘이 아니라 하나다. 불가능성 속에서 가능이 잉태된다. 닫친 열림이다. 가능성 속에서 불가능이 잉태된다. 열린 닫침이다. 하늘과 땅, 땅과 하늘이다. 망자들의 혼이 세상을 화평케 하라한다. 망자들의 혼이 땅을 사랑으로 넘치게 하라 한다. 열린 닫침 안에 절망이 있으나, 닫친 열림으로 희망이 솟는다. 불가
능에의 용서가 가능으로 바뀐다. 가능에의 분노가 불가능으로 변한다. 망자와 산자가 하나가 된다. 시(時)와 공(空)이 산자와 망자를 함께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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