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달러 문화유산기금 기부로
스미소니안 박물관과 깊은 인연
고종.순종 옥새 반환에도 기여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워싱턴DC의 스미소니안 박물관은 8월 15일부터 9월 19일까지 한인이민 100주년을 기념하는 재미작가 18인전을 개최하고 있다. 백남준, 강익중 등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인대표작가들의 주옥같은 작품들이 스미소니안을 통해 세계의 미술 애호가에게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스미소니안이 이처럼 한인작가들의 작품전을 개최하는 이례적인 행사는 워싱턴에서 Korea Foundation(한국문화예술재단)을 만들어 한국문화 보급에 앞장서 온 윤삼균 회장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윤회장은 한 마디로 스미소니안 박물관을 꽉 잡고 있는 실력자이다. 그와 스미소니안의 긴밀한 관계는 지난 1987년 고종과 순종의 옥새 등 국보급 유물을 한국에 반환한 사건에서 잘 나타난다. 당시 캘리포니아에 살던 어느 미국인 소장가가 36년 전 서울의 어느 시장에서 산 옥새를 감정해 줄 것을 스미소니안에 의뢰해 왔다. 스미소니안에 Korean Heritage Fund(한
국문화유산기금)를 만드는데 앞장섰던 윤회장은 스미소니안에 국보급 유물을 한국에 되돌려 보내줄 것을 요청, 박물관 측이 소장가에게 의사를 타진하는 편지를 썼고 소장가는 그간 보관료 7,500달러를 받고 옥새를 돌려주는데 동의했다.
윤회장은 한인들에게 호소하여 기금을 모금, 소장가에게 7,500달러를 주고 옥새를 받아내서 한국에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윤회장이 소미소니안 박물관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1981년 개최된 ‘한국미술 5천년전’이었다고 한다.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미주순회 전시에 나선 한국미술 5천년전은 당시 5공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진 행사였기 때문에 한인들의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윤회장은 한국문화예술을 미국사회에 대대적으로 알릴 수 있는 이 전시회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후원회를 만들어 1만여달러의 후원금을 모아 스미소니안 박물관에 전달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스미소니안에 한인 행사를 주선하는 길을 트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85년 Korea Foundation을 만들면서 문화예술 활동을 더욱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이 코리아 파운데이션을 통해 스미소니안에 Korean Heritage Fund, 즉 한국문화유산기금을 만들었다. 한국문화유산기금은 스미소니안에 별도로 설치한 기부 구좌로 이 구좌에 기부한 돈은 한국문화에술을 위한 활동에 쓰여지도록 한 것이다. 이 문화유산기금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옥새 반환운동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스미소니안에 보관되어 있던 3,000여점의 한국 유물을 보수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윤회장은 스미소니안에 여러 차례 한국 공연물의 공연을 주선했을 뿐 아니라 1997년에는 스미소니안 국립자연사박물관에서 한국 불상의 전시가 끝난 후 그 자리에 한국도자기 33점을 영구 소장시켜 한국도자기 전시실을 만들기도 했다. 또 내년에는 한국정부의 도움을 받아 스미소니안 박물관의 중심부에 한국갤러리의 설치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한다.
Korea Heritage Fund의 성공 사례를 보고 스미소니안에는 그후 Japan Heritage Fund와 China Heritage Fund가 생겨나기도 했다.대구가 고향인 윤회장은 한국에서 영남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이어 계명대 목공예과를 수료했다. 그 후 영남대에서 목공예를 강의하기도 했고 주택 건설과 실내장식 등 건축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미술계에서도 지방대학 출신으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낀 그는 미국에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도미를 결심했고 1972년 워싱턴의 한 실내장식 회사에 취업되어 미국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워싱턴에 정착한 그는 3년 후인 1975년 직장을 그만 두고 이스턴 건축회사를 차려 주택건설업에 뛰어들었다. 한편으로는 이스턴 화랑이라는 갤러리를 차려 운영했고 1978년 워싱턴 미술가협회를 조직하고 사업가로서 재미한국청년회의소를 창설했다. 그는 건축가로서 명성을 얻어 그의 회사가 지은 주택이 워싱터니안 잡지의 주택상을 받기도 했고 고어 전 부통령이
상원의원 시절 그의 워싱턴 저택을 지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워싱턴과 시카고의 우래옥 식당 공사를 맡는 등 그는 건축업으로 돈도 꽤 벌어 문화예술사업에 상당한 돈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스미소니안에 한국문화예술기금을 만든 Korea Foundation은 곳곳에 한국문화예술기금의 설치를 확대해 나갔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이 기금이 설치된 곳은 샌프란시스코 미술관, 시카고 예술대학, 필라델피아 박물관, 메릴랜드대학을 포함하여 5곳에 이른다. 윤회장은 이런 기금을 설치하여 현지 동포사회에서 운영토록 하고 있는데 자신의 역할을 씨앗을 뿌리는 일로
비유한다. 이런 한국문화유산기금에 지금까지 200만여달러의 기부금이 들어갔는데 그 결과 한국문화예술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이처럼 한국문화예술과 미국의 주류사회를 연결시키는 일을 하는 자신을 ‘문화 기술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신이 문화기술자임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미국의 어느 곳에서든지 현지 동포들이 한국문화예술기금을 만들고 싶어한다면 어느 때나 달려가 도와주겠다고 한다.
문화예술기금을 만들면 마치 ‘고기 잡는 법’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문화예술행사를 크게 펼쳐나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래서 박물관과 대학 등이 많은 뉴욕, 보스턴지역에서 이런 활동이 활성화 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한국문화유산기금을 통해 도움을 준 기관으로부터 그는 수많은 감사의 편지를 받았다.
그런데 옥새 반환을 받은 한국에서는 10년이 지난 후에 감사의 편지가 왔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의 옥새의 안내문에 ‘재미교포 기증’으로만 되어 있다고 그는 서운한 감을 감추지 않기도 했다.
이제 이민 1세로서 은퇴를 앞두고 있는 윤회장은 요즘 자신이 20여년간 이끌어 온 한국문화예술사업의 대를 이을 젊은 세대의 영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한국문화예술의 보급에 관심이 많은 2세들이 Korea Foundation에 들어와서 일해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는다. 또 문화의 보급은 정치, 경제와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젊은 문화기술자를 많이 양성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청년상공회의소를 통한 젊은 세대의 경제적 진출, 이러한 경제력을 토대로 한 정치적 진출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인 2세들의 정치적 진출을 도와 2세 연방의원을 탄생시키는 일에 진력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기영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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