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대통령이 팍삭 늙었다. 9·11 테러사태 이후 머리는 잿빛으로 바뀌었고, 얼굴에 패인 고랑도 깊어졌다.
시간을 앞서 간 부시 대통령의 ‘압축적 용모변화’는 국가의 비상사태를 맞아 그가 감내해야 하는 중압감과 마음 고생이 어느 정도인지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대통령이란 그리 만만한 자리가 아니다. 가정을 꾸리고, 사업을 일으키는 것만 해도 숨이 턱에 찰 만큼 벅찬 일인데 국가경영의 대업이 쉬울 턱이 없다. 대통령은 국정 최고책임자이자 군통수권자로서 국가와 국민의 안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에 따라 수 천명의 꽃다운 젊은이들이 피를 흘릴 수도 있고,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지경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그 대표적 예가 쿠바 미사일 위기다.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백악관에 입성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 후 2년도 채 안 돼 소련과의 전면전으로 연결될 수 있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62년 10월 소련이 미국의 턱밑인 쿠바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려들자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를 단행, 소련의 최고지도자 N.S. 흐루시초프로부터 쿠바내 미사일과 폭격기 철수라는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핵전쟁의 위기를 무사히 넘김과 동시에 미국의 자존심을 방어했다.
미국의 국가안보는 쿠바 사태이래 40년만에 최대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당연히 국민은 케네디에 비견될 만한 강력한 리더십을 원한다. 전대미문의 테러로 3,000여명의 생명이 분해되고, 국가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장면을 목격한 미국인들은 속이 확 터지는 화끈한 대응책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세계 유일의 수퍼파워를 자처하는 미국은 군사력 사용에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
동네 유지의 딸이나 아들이 불량기 넘치는 이웃집 아이에게 두드려 맞았다고 가정해 보자. 가장 속시원한 대응은 그 아이를 붙잡아 단단히 혼내주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조용하고 평화스런 동네를 만들기 위해” 폭행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던 마을의 다른 아이들까지 “조만간 사고를 치게 될 불량아”라는 이유를 달아 쥐어박으러 든다면 이웃의 비난을 면키 어렵다. “돈 있고, 힘 좋다고 지나치게 오만하게 군다”는 볼멘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다.
지금 부시 대통령이 직면한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대 테러전선을 아프간에서 이라크로 확대하려는 그의 계획에 국제사회의 비난이 악마구리 끓듯 한다. ‘오만한 일방주의 외교’ ‘신제국주의’ 등 그의 외교정책 전반에 대한 비난과 질책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독일의 여성 법무장관으로부터 “히틀러 같은 인간”이라는 ‘막말’까지 들었다(헤르타 도이블러-그멜린은 총선으로 물갈이됐다). 9·11사태 이후 세계 각국이 보여주었던 미국에 대한 따듯한 애정은 지독한 반미감정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사태로 야기된 군사행동의 수순과 범위를 놓고 40년 전의 케네디 대통령 못지 않게 고민했을 것이다. 그의 상한 얼굴에서 노심초사의 흔적이 읽힌다. 그러나 그가 적절한 판단을 내렸는지는 확실치 않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힘에 의존한 유아독존식 처세는 필경 국제적 고립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팔 비틀기 식의 외교를 통해 우방국들을 미국이 정한 정책의 틀 속으로 끼워 넣으려는 시도는 저항지수만 높일 뿐이다. 부시 대통령이 조금 더 고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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