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눈뜨고 코를 베였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누군가 당신의 신상정보를 이용해 벤츠와 렉서스 등 고급 차를 여러 대 구입한 후 달아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최근 이같은 신분도용 범죄 피해를 당한 한인 조모씨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 다니느라 정신도 없고 피곤하기도 하지만 더욱 답답한 것은 어디서 자신의 신상정보가 새어 나갔는지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저 얼마전 차를 샀던 한 딜러에서 정보가 빠져나간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뿐인데 DMV에 운전면허 변경을 신청하고 집 전화 번호를 바꾸는 등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 놓기는 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여전 하다.
조씨가 당한 피해는 이제 아주 흔한 사례가 되고 있다. 그만큼 신분도용 범죄가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남의 신상정보를 이용해 물건도 구입하고 돈을 빌릴뿐 아니라 심지어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생명보험금을 타내기까지 한다. 병원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병원이 갖고 있는 환자 정보야말로 신분도용 범죄에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된다. 소셜번호, 집주소 등 기본정보에다 신장, 체중, 병력까지 한 사람을 신분을 완벽히 증명해 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신분도용 범죄는 정보화 시대가 낳은 부산물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신분도용 범죄’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다. 그러다 90년대 소비자 데이터베이스가 크게 늘어나면서 정보 접근이 용이해 지고 악용의 가능성이 커졌다. 금융기관들의 잇단 합병으로 은행, 증권, 보험등 각 부문의 소비자 정보들이 통합되면서 퍼즐 같던 조각 정보들이 큰 그림이 됐다.
게다가 시대의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는 정보관리 시스템 또한 이런 범죄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소셜번호인데 도처에 널려 있는 이 번호가 신원을 확인하는 통상적인 패스워드로 사용되고 있으니 많은 허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얼마전 예일대 사이트를 해킹해 물의를 일으켰던 프린스턴 대학 교직원도 남의 소셜번호를 이용해 컴퓨터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이들 유치원 입학원서에도 기입하고 회계사무실에서 세금보고 할 때도 적는 소셜번호는 패스워드로서의 기능을 이미 상실했다. 그런데도 “소셜번호 마지막 4자리 숫자”를 마술의 주문처럼들 외워대고 있다.
신분도용 피해는 사람을 마르게 한다. 금전적 피해야 물건을 팔거나 돈을 빌려준 업체들이 떠 안겠지만 잘못된 크레딧 기록을 바로 잡는 일이 생각처럼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금전피해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정신적 고통과 불편이 따른다. 심할 경우 수년이 가기도 한다. 한 한인은 자신이 범죄 피해를 당한 것을 뒤늦게 발견하곤 이를 정정하기 위해 크레딧 뷰로에 연락을 했는데 영어로 접촉해야 하는 데다 그쪽에서 요구하는 서류와 절차가 너무 복잡해 아예 나빠진 크레딧을 몸의 지병처럼 그냥 지닌 채 살아가기로 했다고 털어놓기도 한다.
신용관리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 보니 신분도용 범죄 예방에는 묘수가 없다. 그저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식으로 세심하게 자기 정보를 관리하는 것만이 예방책이라면 예방책일 뿐이다. 그래서 자기 정보를 남에게 건넬 때는 그 정보가 필요한 이유를 꼭 확인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상대가 영어로 정보를 요구할 경우 한인들은 중압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신분도용은 21세기형 범죄로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몇 가지의 정보가 곧 그 사람을 의미하는 ‘정보 의인화’ 현상이 가속화 될수록 이런 범죄는 비례해 늘어나게 돼 있다. 차를 즉석에서 살 수 있고 융자절차도 간편화되는 등 세상은 날로 편리해지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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