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은퇴연금 401(k) 명세서는 석 달만에 한 번씩 가입자들에게 날아오지만 요즘은 뜯어보지도 않고 버린다는 이들이 꽤 많다. 투자수익은커녕 월급에서 떼 낸 알토란같은 생돈마저 까먹고 있으니 아예 보지 않으면 스트레스라도 피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투자의 금과옥조처럼 이야기되는 분산투자도 요즘 같은 때는 큰 힘을 쓰지 못한다. 그렇다고 401(k)의 포트폴리오를 고정이자만 주는 머니마켓으로 몰아놓기에는 그새 잃은 돈이 너무 억울하다. 한 마디로 뾰족한 대책이 없다.
제 손으로 주식 한 장 사 본 일이 없는 사람도 어느 새 주가 폭락의 피해자가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요것 조것 재면서 주식을 사고 팔고 하지도 않았는데 직장에서 주는 베니핏이라고 401(k)에 가입한 것이 ‘주식 악연’의 원인이 되고 있다.
한 때 5,000선이던 나스닥 지수가 1,200, 1만2,000을 넘던 다우존스가 8,000선에 턱걸이 할 정도로 폭락한 것은 무엇보다 주식가치가 너무 과대 평가 되었던 데다 발표되는 기업수익이 좋지 않은 것이 원인이기는 하지만 요즘은 특히 기업의 회계부정 스캔들이 결정적인 타격이 되고 있다.
기업 회계부정은 ‘주식회사 아메리카’의 국기를 흔드는 범죄라고 할 수 있다. 인종 혐오범죄가 다인종 이민국가인 미국의 뿌리를 위협하는 것과 같다. 숫자만 믿고 투자했는데, 그 숫자가 엉터리였다니-. 투자 목적이 노후대책이었다면 노후의 밑그림이 바뀌고, 학자금을 위한 투자였다면 당장 자녀의 진학대학도 다시 고려해 봐야 하는 상황이 됐다.
특히 기업회계 부정의 주원인이 주가 올리기를 통한 자리 보전과 스탁옵션 행사로 연결되는 최고 경영자(CEO)등 경영진의 사리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장이 크다.
일반 근로자의 임금은 생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반면 CEO는 보너스에 스탁옵션까지 더해 수십만, 수백만달러인 예가 미 기업에는 흔하다. 경제적 평등이라는 서민 정서와는 거리가 있지만 ‘그게 미국식’이라는 말로 받아 들여져 왔었다.
한 조사에 의하면 미국의 중간규모 기업 경영자는 같은 회사 직원의 평균 임금 보다 34배나 더 받고 있다. 일본의 11배, 독일의 13배 등에 비하면 월등히 많다. 일반 근로자의 평균연봉이 3만달러라면 CEO는 100만달러 이상을 가져가는 것이 미국의 현실이다.
지난 10년간 CEO들의 임금 상승률도 엄청나 이를 근로자의 임금에 그대로 적용하면 지난 90년 시간당 3달러80센트였던 연방 최저임금은 지금은 25달러50센트가 돼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연방 최저임금은 고작 5달러15센트에 불과하다.
의회등 미국의 기득 계층은 그새 철저하게 기업과 CEO 편이었다. 국민들이 주식투자로 돈을 벌고, 고용기회가 창출되는 등 나눠 먹기가 가능한 사회 분위기에서는 이것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부는 능력과 노력의 정당한 과실로 받아들여져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회사는 망하고, 종업원은 쫓겨나고, 수십달러짜리 주식은 한 순간에 휴지조각이 되는 상황이 되자 문제는 달라지고 있다. 더구나 파산기업 ‘글로벌 크로싱’의 전 CEO 개리 위닉처럼 회사는 파산을 불렀는데 9,400만달러짜리 벨에어 맨션에 3,000만달러를 쏟아 부으며 리모델링을 하고 있는 사실 등이 알려지면서 분위기는 급변하고 있다.
이번 기업 회계부정 스캔들의 진짜 파장은 주가 하락이라는 숫자에 있는 것 같지 않다. 떨어진 주식은 언젠가 다시 오르게 되어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기업과 부자 기업인을 바라보는 사회 기층의 시각과 가치관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깨끗한 부를 믿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절대 권력이 절대 부패하는 것처럼 ‘절대 재력’도 절대 부패한다는 것을 최근의 사태는 보여주고 있다. 권력이나 재력의 주인도 결국 인간인데 인간의 욕망은 항상 확실하고도 강력한 제3의 제어장치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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