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계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위 계승자)을 사살했을 때, 이 사라예보 사건이 2,000만 명 목숨을 앗아갈 대전쟁으로 번질 거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오-헝 제국은 1급 강대국도 아닌 ‘2류 제국’이었고, 오스트리아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의 분쟁이 유럽의 명운을 가를 만큼 중대사도 아니었다. 사건이 벌어진 곳도 유럽의 변방 발칸반도다.
■ 아무도 국제전을 의도하진 않았지만, 유럽은 세계전쟁을 향해 나아갔다. 러시아가 세르비아(슬라브)를, 독일이 오스트리아(동맹)를 위해 참전했다. 독일이 벨기에를 통과해 프랑스를 노리자, 중립을 지키던 영국이 벨기에 보호 명목으로 독일을 막아섰다. 동맹·민족·왕가 등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엮여 있던 전 유럽이 오스트리아-세르비아 전쟁에 모조리 끌려들어오고 말았다. 이를 두고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불러올 공포를 깨닫지 못한 몽유병자들”이라고 평가했다.
■ 호들갑이라면 좋겠지만, 하메네이가 죽은 2026년 테헤란에서 페르디난트가 사망한 1914년 사라예보 모습이 보인다. 오-헝 제국이나 이란처럼 다민족국가가 흔들리면 틀림없이 원심력이 작용한다. 이미 쿠르드족이 움직였고, 튀르키예는 쿠르드 독립을 지켜볼 리 없다. 이란 공격을 받은 아제르바이잔의 최우방이 또 튀르키예다. 파키스탄은 ‘사우디와 맺은 조약’을 거론하며 참전을 엿보는데, 이게 또 인도를 자극한다. 이란은 판을 키우려고 해협을 막고 이웃을 때린다.
■ 이 전쟁이 끝나도 미국의 관리 능력이 걱정이다. 미국이 개입한 전쟁을 돌아보면, 미군이 싸움을 잘해놓고도 미 정부가 미숙한 수습으로 상황을 악화시킨 예가 적지 않다. 민심을 파악하지 못한 베트남전, 출구전략을 못 찾은 아프간전, 점령지 관리에 실패한 이라크전 등. 게다가 트럼프 행정부는 국제법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분쟁 확산을 피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교훈을 되새기기에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난 것일까. 112년 전처럼 지금 다시 몽유병자의 세상이 도래했다.
<이영창 / 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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