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는 종종 종합 예술로 칭송받는다. 접시 위에 펼쳐지는 섬세한 맛의 레이어, 셰프의 철학이 담긴 다이닝은 갤러리의 작품처럼 소비된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 요리는 예술이기 이전에 치열한 생존이자 지독한 생계이기도 하다. 모든 요리사가 거창한 철학과 미학으로 무장하고 불 앞에 서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매일 반복되는 기예의 숙달을 통해 얻어내는 깨달음은 분명 존재한다. 인고와 반복, 정진의 시간이 쌓이다 보면 요리사의 색깔과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빚어진 결과물은 단순한 요리 한 접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서울 흑석동 어귀. 간판조차 눈에 잘 띄지 않는 이곳에 샤퀴테리(Charcuterie, 육가공품) 전문점 '더 큐어링'이 있다. 이곳의 오너 박진필(48) 셰프는 스스로를 "생계형 요리사"라 칭한다. 이름만 대면 알 법한 해외 요리학교의 졸업장도, 전설적인 스승도 없다. 그가 가진 것이라곤 너덜너덜해진 원서와 수천 번 돌려본 유튜브 재생 목록, 그리고 곰팡이와 싸우다 떠나보낸 연인에 대한 '웃픈' 기억뿐이다.
■ 붓 대신 잡은 칼... 악바리 근성으로 돌파한 난관박 셰프의 20대는 캔버스 위에서 부유했다. 만화가를 꿈꿨던 그는 스토리 작가로, 일러스트레이터로 20대의 전부를 바쳐 습작을 거듭했다. 홍대 앞을 누비며 창작의 열정을 불태웠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소년만화 잡지 입선이라는 작은 성취가 있었지만, 게으름과 방황 사이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서른을 목전에 두게 됐다. 가족과 절연하고 당장 생계를 해결해야 했던 그가 선택한 건, 다름 아닌 요리였다. "스물아홉 살 12월쯤, 살아야겠다 싶어 요리를 택했죠. 단순히 먹고살 수 있는 기술을 배우자고 생각했으니까요.
늦은 나이에 신입 요리사가 되겠다고 나섰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이력서는 번번이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이탈리안 레스토랑 주방에서 그에게 붙은 별명은 '식용'이었다. '장식용'의 줄임말로, 나이만 많고 할 줄 아는 건 없어 주방 한구석에 장식품처럼 서 있다는 조롱 섞인 멸칭이었다.
"매일 혼나고 욕먹는 게 일상이었어요. 하지만 갈 곳이 없으니 버텼죠. 그때 배운 건 요리 기술보다 '악바리 근성'이었을 겁니다."
모멸감은 그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남들이 퇴근한 주방에 남아 칼질을 연습했고, 궁금한 맛의 원리를 파헤치기 위해 원서를 뒤적였다. 그렇게 십여 년, 붓을 꺾은 손에는 굳은살이 박였고 그는 어느새 요리라는 새로운 캔버스 앞에 서 있었다.
■ 독학으로 성공한 샤퀴테리, 수강료는 '이별'그가 샤퀴테리, 즉 염장 건조 햄에 빠진 계기는 단순했다. 제대로 된 이탈리아식 카르보나라 파스타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시판 베이컨이 아닌 이탈리아 정통 관찰레와 판체타를 직접 만들어보겠다는 호기심이 발단이었다. 하지만 유학 경험이 전무한 그에게 샤퀴테리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돈이 없어 외국에 나갈 수 없으니 아마존에서 원서를 사서 번역하고, 유튜브 영상을 0.5배속으로 돌려보며 독학했다. 문제는 환경이었다. 서늘하고 건조한 유럽의 기후와 달리 고온다습한 한국의 여름, 특히 습기가 들이차는 흑석동의 지리적 여건은 샤퀴테리를 만들기에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이론적으론 고기를 건조할 때 습도를 60~80%에 맞추라고 해요. 그런데 여름이 습한 우리나라, 더군다나 서울 도심에서는 냉장고를 쓴다고 해도 적절한 습도를 맞추기가 쉽지 않죠. 독학으로 하다 보니 이렇다 할 스승도 없어서 수없이 실패하며 몸으로 배울 수밖에 없었어요."
그의 연구는 처절했다. 풍미가 좋은 샤퀴테리를 만들기 위해선 고기에 유익한 흰 곰팡이를 피워야 하는데, 해외 전용 종균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국내에서 살루메리아를 운영하는 셰프의 유투브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그는 가루형 프로바이오틱스 유산균을 물에 타서 분무기로 뿌려 이 문제를 해결했다. 당과 균이 만나 활성화되는 원리를 이용한 기술이었다.
흰 곰팡이로 인해 샤퀴테리는 성공했지만 사랑엔 실패했다. 한창 연구를 하던 시절, 겨울에 실내 온도가 너무 낮아 발효가 제대로 되지 않자 소시송과 햄 덩어리들을 싸 들고 집으로 향한 게 화근이었다.
"집에 보일러를 틀고 가습기를 켜놓고 고기들과 같이 잤어요. 그러다 보니 방 안에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고, 저는 나쁜 곰팡이를 닦아내느라 손에서 항상 락스 냄새가 났죠. 당시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결국 차였어요. 데이트하는데 손에서 락스 냄새가 나고, 집에 가면 곰팡이 핀 고기가 걸려 있으니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요."
■ 한국인 입맛에 맞춘 80여 종 햄, 해산물로도 메뉴 확장사랑을 잃고 얻은 노하우로 만든 샤퀴테리는 이제 '더 큐어링'의 상징이 되었다. 박 셰프의 샤퀴테리를 맛보면 의외의 지점에서 놀라게 된다. 바로 짜지 않다는 점이다. 유럽 본토의 샤퀴테리가 대부분 염도 5%에 맞춰져 있는 반면, 그가 만드는 건 2.3% 수준이다. 염도가 낮으면 덜 짜서 먹기엔 좋지만 보존성이 떨어지고 풍미도 덜해진다는 게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도를 낮춘 이유는 한국 사람들의 입맛과 눈높이에 맞춘 배려다.
"외국에서는 샤퀴테리를 와인에 곁들이는 가벼운 안주로 여기는데 한국에서는 어찌 됐든 무조건 배를 일단 채워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요. 너무 짜면 금방 질려 하거나 안 드시는 손님들이 있어서, 최대한 염도를 낮추되 풍미를 끌어올리는 지점을 연구했죠."
그는 철저히 현실을 직시하는 요리사다. 가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본토의 맛을 좇기보다 손님들의 만족도를 더 우선시한다. 건조육 특유의 '콤콤'한 발효취도 적절히 제어했다. 마니아들은 아쉬워할지 몰라도 샤퀴테리가 낯선 대중에게 '더 큐어링'은 친절하고 안전한 입문서가 된다.
샤퀴테리를 연구한 지 12년, 더 큐어링을 오픈한 지 6년 차가 된 그는 그동안 한국 환경에 맞는 80여 종의 샤퀴테리 레시피를 개발했고, 지금도 끊임없이 실험하고 있다. 겨울 제철 굴을 쪄서 염지하고 훈연한 '훈제 굴', 광어와 가자미로 만든 세비체 등 그의 육가공 기술은 돼지고기를 넘어 해산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특히 훈제 굴 요리는 수분이 60%까지 날아가는 '수율 최악'의 메뉴지만, 그 맛을 못 잊는 손님들을 위해 그는 묵묵히 굴을 찐다.
■ 불안했던 청춘과 고단한 하루 치유하는 가게인터뷰 내내 유쾌하게 농담을 던지는 그였지만, 사실 그는 극도의 내향형 인간이다. 오픈 초기엔 손님에게 말 거는 게 두려워 주방 구석에 숨어 있었고, 심한 경우 공황장애와 대인기피증까지 겪었다. 매니저 뒤에 숨어 벌벌 떨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사장' 박진필은 '인간' 박진필을 넘어서야 했다. 가게를 살리기 위해 그는 가면을 썼다.
"가게는 무대고, 저는 연기자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샤퀴테리라는 낯선 음식을 즐기게 하려면 분위기를 풀어주는 광대가 필요했으니까요." 그는 때로 말 가면을 쓰고 서빙을 하고, 손님 테이블에 가서 넉살 좋게 와인을 추천한다. 분위기가 처진다 싶으면 신나는 음악을 틀고, 자신의 실수담을 안주 삼아 손님들을 웃긴다. 그가 꿈꾸는 공간은 격식 있는 다이닝이 아니라 즐거운 아지트다.
일과가 끝난 뒤 텅 빈 가게에서 위스키 한 잔을 따르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시간이 그에겐 유일한 휴식이다.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공간에서 그는 다시 내향적인 소년으로 돌아가 운다. 때로는 고단함에, 때로는 안도감에 눈물을 흘리고 위스키로 속을 씻어낸 뒤 집으로 향한다.
가게 이름 '큐어링(Curing)'은 중의적이다. 식재료를 '염장'한다는 뜻이자, 누군가를 '치유'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그는 고기를 염장하며 자신의 불안했던 청춘을 다스렸고,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그의 요리와 술 한 잔으로 고단한 하루를 치유받는다. 그가 만든 햄은 기다림의 미학이다. 4개월, 길게는 반년 가까이 온도와 습도 속에서 견뎌낸 고기들이다.
"대단한 사명감은 없어요. 그저 버티는 겁니다. 고기도, 사람도 적절한 온도와 습도 속에서 시간을 견디면, 언젠가 근사한 풍미를 내지 않겠습니까."
얇게 저민 론자(Lonza)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부드러운 육질 사이로 은은한 짠맛과 감칠맛이 퍼졌다. 그것은 요행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시간을 견뎌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정직하고 깊은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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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우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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