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는 과대망상가였다. 예술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과대 측정했고 그 결과 20시간 짜리 악극 ‘니벨룽의 반지’가 탄생하기도 했는데 바그너 매니아들의 입장에선 초인적인 노력의 결실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직업 음악인들이 아닌 일반인들의 입장에선 그저 돌연변이거나 미치광이 중의 하나였다. ‘니벨룽의 반지’가 초연될 당시 차이코프스키도 초청받았는데 그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을 기고했던 기사가 여지껏 남아있다.
차이코프스키의 말인즉슨 작곡가인 자신이 그렇게 느낄 정도면 일반인들의 입장에선 오죽하겠냐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바그너는 자기 작품에 대한 추호의 의심이나 개선의 의지 같은 것은 없었고 오히려 그의 작품이 대중을 선도하고 머지않아 인정받을 날이 올 것을 굳게 믿었다. 사실 요즘에 와서는‘니벨룽의 반지’가 오페라 레퍼토리의 하나로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받고 있으며 대중의 인지도 역시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오히려 오페라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니벨룽의 반지’를 봐야하며 그래야 찐팬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들이다. 사실 바그너의 이야기를 하면서 ‘니벨룽의 반지’를 빼놓을 수 없고 그중에서도 핵심 내용인 ‘발퀴레’ 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가 없다. 그것은 ‘발퀴레’가 바로 바그너이고 바그너가 바로 ‘발퀴레’이기 때문이다. 다소 해괴한 결론 같지만 여성숭배자였던 바그너에게 있어서 악극 ‘니벨룽의 반지’는 28년을 소비할 만큼 공을 들인 작품이었고 그 핵심 내용이 들어있는 작품이 바로 여주인공의 탄생을 그린 ‘발퀴레’였다. 그러기에 바그너는 ‘니벨룽의 반지’를 창작하는데 있어서 남 주인공(지그프리드)보다는 여주인공 발퀴레의 탄생 과정을 더욱 영웅적인 낭만적 서사시로 그리고 있다.
애정 결핍증 환자였던 바그너는 그 스스로 단 한번도 이상적인 여성을 만나지 못했다고 고백한 바 있었다. 영웅호색이라고 하지만 바그너 만큼 여성 편력이 화려했던 인물도 드물었다, 그것이 단순히 애정결핍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호색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바그너의 구애는 다양하고도 지저분한 것이었으며 친구의 아내, 유부녀 가릴 것이 없었다. 그의 마지막도 심장병이 있는 와중에 ‘파르지팔’에 출연했던 소프라노와 염문을 뿌리다가 이태리까지 가서 과다 흥분으로 죽었는데 쉬쉬하는 형편이다. 아무튼 바그너의 구애는 만족이 없었고 여성편력이 손가라질 받았음에도 바그너는 스스로를 예술로 포장하며 이를 정당화시켜 나갔는데 ‘발퀴레’야말로 악극이 보여주고 있는 바그너의 모습이었자 과대망상가 바그너가 보여주고 있는… 바그너판 낭만주의의 결정판이기도 했다.
발퀴레(영어명 발퀴리-Valkyries)는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여전사들로서 주로 천마를 타고 하늘을 나르며 전쟁터의 부상자와 죽은 영혼들을 운반하는 간호 역할을 하는 사자(死者)들이다. 하늘의 主神 보탄은 언젠가 땅에 내려와 두 쌍둥이를 낳았는데 그들이 바로 지크문트와 지크린데였다. 두 사람은 운명적 사랑에 빠지는데 이를 본 보탄은 자신의 딸이자 용맹한 발퀴레 브륀힐데를 보내 이들의 사랑을 멈추게 할 것을 지시하지만 브륀힐데는 오히려 이들의 사랑을 동정하고 남매 사이에서 영웅 지그프리드가 탄생하게 만든다. 이에 보탄은 하늘의 법도에 따라 사랑하는 딸을 자신의 손으로 영원히 잠들게 하는 의식을 행사하게 되는데 이때 불리어지는 노래가 그 유명한 ‘이별의 노래 - 잘 있거라 대담하고 뛰어난 딸아’이다. 브륀힐데는 영원히 타는 불 속에 갇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 지그프리드에 의해 다시 부활하게 되는데 진정한 사랑은 오직 죽음을 넘어선 용기를 가진 자들만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비극의 주체로서 5시간의 노력이 오직 한 여인의 죽음을 그리는데 바쳐지고 있다면 피식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이 죽음과 맞바꿀만큼의 (아름다운) 사랑… 바로 바그너 예술이 추구하고 있는 진정성(?)과 아이러니가 있다는 것이 감동의 사유다. ‘발퀴레’를 만나지 못하고 낭만주의(예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아직 이를지 모르겠다.
위대한 겨울이 없는자는 인생의 껍데기, 즉 절반밖에 살지 못한 자들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한다. 음악을 모르는 자들과는 말을 섞지 말라고 하는 것은 풍악을 울리고 풍류를 즐기자는 뜻이 아니라 삶의 의미… 죽음 같은 인내 속에 숨어 있는 진정한 유산… 인생의 겨울을 모르는 자가 되지 말라는 뜻이다. 바그너를 숭배할 생각은 없지만 어떤 자들은 오직 예술로만이 그 삶이 완성되는 법이다. 그러기에 바그너의 예술은 적어도 정신적인 사치나… 세속적인 흥행을 위해 써진 것은 아니었다. 비록 20시간의 정신적인 노동과 인내를 예약한 난산이라해도 살을 애이는 동풍(冬風) 속에서 미구에 다가올 풍성한 아름다움을 예감하는 기다림이기에… 기꺼이 감내해나갈 수 있는 죽음같은 어둠이며 맹독의 고통 속에서도 꿈꿀 수 있는 예술(가)의 진정한 모습… 로맨티스트의 진짜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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