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은 단순한 명절이 아니다. 수천 년 동안 농경민족으로 살아온 한민족이 수확의 기쁨을 나누고 조상을 기리며 공동체의 결속을 다져온 날이다.
신라 시대의 집단 길쌈놀이 ‘가배’에서 비롯된 이 풍속은 유교가 뿌리내린 조선시대를 거치며 가족 중심의 제사 문화로 정착했고, 오늘의 추석으로 이어졌다. 비록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던 축제가 가족 단위의 의례로 축소되었지만, 추석은 여전히 한민족 최대의 명절이며, 우리 정체성을 확인하는 날이다.
한민족의 조상 숭배는 유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온 토속 신앙의 뿌리 깊은 문화다. 유교는 다만 그 예법을 체계화했을 뿐이다.
한민족은 기제사뿐 아니라 설, 한식, 단오, 추석 같은 명절마다 조상을 기리며 그들의 은덕을 되새기고, 가족의 뿌리를 확인해왔다. 제사는 단순히 죽은 이를 위한 의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이 자신을 기억하기 위한 행위이며, 언젠가 자신 또한 기억되길 바라는 인간의 본능이 담긴 문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 조상, 공동체의 인물, 민족의 영웅을 기억함으로써 존재의 연속성을 유지해왔다. 육체는 사라지지만, 기억된 존재는 공동체의 기억 속에서 사회적 생명으로 남는다.
역사 속 인물을 기리고, 그들의 가치를 후대가 내면화하려는 노력은 그 사회의 품격을 결정짓는다. 동상, 기념관, 기록, 교육으로 이어지는 ‘기억의 문화’는 공동체의 영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미주 한인 공동체는 누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로스앤젤레스 도심의 10번과 110번 고속도로가 만나는 지점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이름이 새겨진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가 있다.
리버사이드 시청 앞 거리에는 도산의 동상이 서 있고, UC 리버사이드에는 김영옥 대령 연구소가 운영 중이다. 필라델피아에는 서재필 박사를 기념하는 ‘필립 제이슨 기념관’이 있다. 이들은 모두 공동체의 기억 속에서 영생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아직 많은 한인 선각자들이 잊혀져 있다. 120년이 넘는 미주 한인 이민 역사 속에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지만 이름조차 남지 못한 이들이 수없이 많다. 한때 활발했던 업종별 협회와 한인회들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공동체의 기반을 세워야 할 때다.
지금 미주 한인사회에는 ‘한인 커뮤니티 센터’가 절실하다. 한글과 문화를 가르치고, 미국 사회에서의 삶을 돕는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결혼식과 돌잔치 같은 인생의 의례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 그런 곳이 곳곳에 세워져야 한다.
그리고 그 공간마다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인물들의 이름과 얼굴이 남아야 한다. 커뮤니티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재산을 내어놓은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후대가 기억해야 할 진정한 조상들이다.
이민 와서 번 돈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돈은 세대를 넘기지 못한다. 반면, 공동체를 위해 남긴 흔적은 수백 년을 간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커뮤니티 센터, 민족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공간에 기여한다면, 사회적 생명을 얻어 공동체와 함께 영생할 것이다.
미국에서 추석은 단지 조상의 제삿날이 아닌. 기억의 날, 그리고 공동체를 되살리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조상처럼, 후대에게 기억될 무언가를 남기는 용기다. 기억은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이 공동체를 영원히 살아 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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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 시민참여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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