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Virginia 주 수하스 수브라만얌 연방하원의원의 리스버그 사무실에서 이분과 면담할 기회가 있었다. 이 자리엔 시카고에서 오신 미주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 이차희 사무총장님을 비롯하여 여러 실향민들이 참석하여 서로의 소개와 함께 어떻게 정든 고향을 떠나 실향민이 되었는지와 수하스 의원이 제출한 H.R.1273 안이 이 해에 꼭 하원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힘써줄 것을 부탁하였다.
38세의 젊은 인도계 수하스 의원은 우리 노장들의 한 많은 이야기를 경청한 후 재미 이산가족 상봉 추진안을 올해 2월에 이미 하원에 상정하여 현재 외교 분과위에 들어가 있으며 자기와 같이 이 안에 서명한 영 킴 의원과 또 다른 의원들과 힘을 합하여 이 안이 통과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차희 사무총장님은 만주의 첩첩 산골, 다푸차허라는 곳에서 출생하셨는데 그곳은 독립군들의 은거지이기도 했으며 아버님은 그곳에 거대한 땅의 소유자로 장정 120명을 거느리고 그 넓은 광야를 개척하셨다. 해방 직후 아버님은 아들 웅희를 제외한 6남매와 어머님을 고향인 대구로 보내셨다. 아버님은 웅희 오빠와 만주에 남아 재산 정리를 하고 뒤따라 대구로 오실 계획이었는데, 가족이 떠난 후 중국과 북한의 국경이 닫혀 버려 사무총장님 가족은 이산가족이 되었다고 한다.
1949년 중국 정부는 아버님에게 군대를 지원해 주고 사평 전투의 대장으로 임명했으며, 아버님이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자 그 대가로 북한으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아버님과 웅희 오빠가 북한으로 넘어간 지 얼마 후 6.25 전쟁이 발발, 북한의 웅희 오빠는 인민군으로, 남한의 세 오빠들은 국군으로 적이 되어 싸웠으니 한반도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6.25 전쟁 후 삼팔선이 그어져 회장님 가족은 영원한 이산가족이 되었다고 하신다.
장송 장로님은 함흥이 고향이시며 국군이 압록강, 두만강 남쪽까지 점령하여 승리는 거의 확실할 때 중공군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국군이 주둔하고 있던 함흥의 한 학교에 갔더니 군인들이 학교 마당에 트럭을 세워놓고 청년들과 학생들은 다 타라고 하여 탔더니 트럭이 흥남 부두에 도착하였다. 장로님은 정박해 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Meredith Victory)에 승선하여 남한으로 오게 되었다. 이렇게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작별 인사도 못하고 실향민이 되셨다.
거제도에 도착하여 아무 연고자도 없고 갈 곳이 없어 한국군에 입대하여 6.25 전쟁에 참전하였고, 그 후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다. 또 캄보디아 전쟁에는 대통령 경호 부대 대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고, 대통령으로부터 캄보디아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란 특별 명칭까지 부여받았으며, 캄보디아 시민이 되어 달라는 청탁을 받기도 했다고 회고하셨다. 올해 92세인 장로님의 태권도 실력은 black belt 9단이시며, 요즈음에는 고향 생각이 사무칠 때마다 ‘비 내리는 고모령’, ‘타향살이’ 노래를 색소폰으로 연주하시며 눈물을 흘리신다고 하셨다.
필자는 모든 농토와 집을 숙청당한 후 부모님과 아직 결혼하지 않은 언니, 오빠와 같이 3살 때 언니 등에 업혀 구사일생으로 삼팔선을 넘어 남하한 실향민이다.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내 고향, 북녘 땅 평안북도의 작은 마을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지만 어머니와 언니, 오빠들을 통해 수없이 옛 고향집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아직도 난 고향집 주소를 외우고 있다.
엄동설한에도 땅에 묻어 두었던 항아리에서 꺼낸 동치미 국물로 집에서 직접 만든 메밀국수로 냉면을 먹었던 이야기 등등을 듣던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다들 하늘나라로 떠나시고, 7남 3녀 중 막내인 나 혼자만 남았다.
어떤 실향민 장로님은 소천하시기 직전 아들에게 유언을 하셨는데, 자신이 죽은 후 화장을 해서 골분을 간직했다가 통일이 되면 이북 고향 땅에 뿌리라고 하셨고, 저희 어머님은 제가 미국에 있어서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지만 “너희들 세대엔 꼭 통일이 되기를 하늘나라에서 기도하겠다. 이북에 두고 온 너희들 오빠들, 언니를 못 보고 가누나”라고 말씀하셨다는 유언을 들으며, 어머님께서 북에 두고 온 자식들을 그리는 그 애절한 마음을 지금 팔순이 되고 보니 더 절실히 느껴진다.
20년 전만 해도 미주 실향민들이 만 명 이상 되었는데 이제는 다 돌아가시고 생존해 계신 분들이 천 명 이하라고 한다. 수하스 의원이 제출한 H.R. 1273 안이 하원은 물론 상원에서도 통과되어 북한에 계시는 가족들의 생사 확인 및 이산가족 상봉이 실현될 수 있도록, 그리고 내 생전에 내 고향 북녘 땅을 밟아볼 수 있길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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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에스터 라우든 카운티 공립학교 전직 교사 애쉬번,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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