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100세가 가까운 인생을 살아오며 그 옛 시절 보고 느낀 바로는 진실이 왜곡돼서야 안 되겠다고 하는 노파심에서 펜을 들게 되었다. 바로 한반도 분단과 통일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전하려 한다.
우선 해방 전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가 일제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청년 이승만은 고종 황제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에 건너가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 독립을 호소했다. 미국에 머물면서 무일푼 처지이면서 여러 유명 대학을 전전, 장학금을 받아 공부하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을 만큼 재능을 겸비한 천재 정치인이기도 했다.
그는 미국 곳곳을 다니며 독립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수립, 초대 대통령직도 수행했다. 그는 또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선각자이기도 했다. 1941년 일본이 강해지면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 분명하다고 ‘일본세 막기’ 책을 발간한지 불과 몇 달 후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게 되자 세계정세를 바로 보는 탁월한 정치인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1942년에는 ‘ 미국의 소리 ’ 방송을 통해 “ 일본이 곧 패망하니 조국 동포 여러분, 해방이 곧 올 것입니다. ” 라고 외쳤다. 당시 한국 국민들에게는 하늘이 내리는 희망의 소리였다. 드디어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세례를 받고 일본 천황이 8.15일 정오에 무조건 항복 방송을 하고야 말았다.
해방 후 귀국해 보니 찬탁, 반탁 데모가 연일 시끄러웠고 북에는 김일성이 이끄는 북로당, 남한에는 박헌영이 이끄는 남로당으로 온통 공산주의자들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 하에서 이승만 박사가 기지를 발휘하여 UN 승인 하에 단독 정부를 세우게 된 것이다.
만일 그 때 남북한 동시 선거를 실시했더라면 당시 상황으로는 꼼짝없이 공산국가가 될 수밖에 없었으니 이승만 박사의 결단이 주효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건국대통령으로서 우리나라의 일등 공신임에 틀림없다.
또한 6.25 전쟁도 우방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 진다. 그리고 역대 정권에서도 평화 통일을 염두에 두고 수십 억, 수백 억원의 보조까지 해주며 달래봤건만 마이동풍, 굶주리고 있는 백성들은 안중에 없고 그 돈으로 오직 핵무기 개발에만 몰두, 지금도 계속 무력 도발을 하고 있는 상태다.
언제 제2의 6.25가 터질 지 전전긍긍할 이 판국에 무슨 평화 통일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견고한 국방력 강화에 한미일 협력관계가 버팀목이 될 때에 북이 깔보지 못하는 최선의 방책임을 강조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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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빈/뉴욕원로자문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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