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속에서도 다양한 방식들로 진행되는 Class 2020 졸업식 소식을 들으니 학창시절이 문득 생각난다. 검정 교복과 빳빳하게 풀 먹인 흰 칼라 위에 빛나던 학교 배지와 노란 이름표, 검은색 쓰리세븐 가방을 들고 어색한 단발머리를 쓸어 올리며 거울 앞에 서있던 풋풋한 여중생이 보인다. 문학소녀 흉내를 내며 예쁜 편지지에 멋진 싯귀를 인용해서 손 편지를 보내고, 라디오 ‘별밤’에 사연과 신청을 보내며 선곡되길 기다리던 꿈 많던 그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상담사로 일하며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때 즐겨 외우던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자주 생각난다. 꿈 많은 여중생이 삶에 얼마나 속았다고 그 싯귀를 공감하고 읊조리고 다녔는지… 지금 돌아보니 피식~ 웃음이 난다. 어른이 되면서 삶은 결코 교과서의 가르침처럼 녹록치 않고, 나의 계획과 무관하게 터지는 예측불허한 일들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음을 배웠다. 내담자들이 찾아와 삶이 자기를 어떻게 속였는지 보여주려는 듯 자신들의 아픔과 고통을 꺼내 보이며 억울해하고 분노한다. 그래서 시인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했나보다.
그런데 문득 ‘삶이 우리를 속인 건가? 아니면 기대한 삶이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아 내가 속았다고 믿는 건가?’란 질문이 마음에 던져진다. 나는 삶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지? 시인은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라고 말하지만 정말 즐거운 날이 꼭 오는가? 삶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 혹시 내가 속은 것은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내가 삶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시각과 관점을 되짚어본다. 철학자 에픽테투스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보는 우리의 관점이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생각 혹은 신념체계를 바탕으로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삶을 보는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끔씩 다시 꺼내보는 책 중에 정신과의사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The road less traveled)’이 있다. 오랜 만에 꺼낸 첫 장 첫 줄의 ‘인생은 힘들다(Life is difficult)’란 글귀 앞에 멈춰 섰다. 이 문장이 새롭게 가슴 깊이 인정된다.
‘맞다... 이게 인생이지.’ ‘삶은 문제의 연속’이란 사실을 마음이 불편하고 슬프고 아프지만 진심으로 인정하고 나니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문제해결 의식이 꿈틀거린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잊어버리고 ‘도대체 왜?’라는 질문에 묶여 스스로를 괴롭히곤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외칠 수 있는 일들이 지금도 세상에 일어나고 있다. 코비드-19과 조지 플로이드 사건뿐 아니라 책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끔찍하고 슬프고 고통 가득한 현실이 내담자뿐 아니라 지인들의 삶에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삶은 문제들의 연속’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면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문제해결의 의지와 ‘어떻게 해결할까’에 대한 방법에 에너지를 쏟게 된다. 문제를 무시하거나 피하면 잠깐은 해결되는 듯 보이지만 결국 더 큰 문제가 되어 돌아온다. 시인은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상담사인 필자는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하고 미래를 바라기 때문에 현재가 한없이 우울하다’고 설명해주고 싶다.
문제 뒤에 숨겨진 두려움을 마주할 용기와 지혜가 또한 필요하다. 함께 문제를 풀어줄 조력자나 잘 훈련된 상담사를 찾거나 좋은 책을 통해서 배우는 방법도 있다. 다가오는 삶의 문제들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로 관점과 시각을 바꾸는 일. 그것이 삶이 나를 속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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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 이 부부가족 치료사 Daybreak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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