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의 새해 결심으로 입조심, 말조심을 정했다. 정해 봤자 못 지킬 것이 뻔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낫다’는 평소의 신념대로 새해 계획을 세웠다. 좋은 말만 하자, 상대방을 격려하고 희망을 줄 수 있는 따듯한 말만 하자. 무엇보다 남의 말을 경청하고 말 수를 줄이자. 굳게 다짐했지만 며칠 만에 의외의 곳에서 무너졌다.
신년모임에서 식사를 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이민 와서 고생한 야기들을 이제는 즐거운 에피소드처럼 주고받았다. 미국 와서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묻기에 나는 내세울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어 무심히 일을 안 했다고 말했다. 사정을 아는 분이 주재원 비자라 부인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거들어 줬다.
집에 오는 길이었다. 동승한 동네친구가 “나도 일을 안했다는 말을 사람들 앞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뉘앙스에 가시가 돋친 느낌을 받았다. 뭐가 잘못 됐나? 친하게 지내던 친군데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했지?밤새 뒤척이다가 문득 그녀가 해준 말들이 생각났다. 지금이야 은퇴해서 편하게 살고 있지만 처음 미국에 와서 비즈니스를 할 때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다. 남편과 24시간 붙어 지내며 겪었던 스트레스와 갈등들.... 결국 남편과 독립하여 직장을 구한 일, 먹고 살기 위해서 했던 고달프고 지겹던 일들을 들려 준 것이 떠올랐다. 나는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싶었지만 일할 수 없는 처지라 일하는 사람이 부러웠는데... 그녀는 돈 버는 일 안하고 사는 가정주부가 팔자 좋은 여자로 보였으리라. 얼마나 일에 사무쳤으면 그랬을까. 그녀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나의 선의의 말을 오해해서 상대방이 우리 집안과 의절한 경우도 있다. 오래 전의 일인데도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친척 언니 중에 아기를 낳지 못한 이가 있었다. 아이가 없으니 친척 모임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고민 끝에 H라는 예쁜 어린아이를 양녀로 입양했다. 그 후로 언니와 형부는 입양한 딸과 함께 친척모임에 자주 참석했다.
친척의 생일잔치에서 그 일이 일어났다. 우리 애들이 어려서 밥을 잘 먹지 않아 애를 태웠다. 내가 쫓아다니며 숟가락으로 떠먹이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형부와 눈이 마주쳤다. 무안하기도 해서 내가 한다는 소리가 “H는 언니가 안 나서도 밥도 잘 먹고 제 앞가림 잘하니 좋겠어요.”라고 내 깐엔 아첨 성 발언을 했다. 그런데 그 형부가 웃지도 않고 무서운 얼굴로 변했다. 그땐 왜 그런지 몰랐다. 후에 들리는 소리가 내가 한 말 때문에 우리 집은 물론 우리 성씨를 가진 집에는 발걸음도 안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유인 즉 “언니가 안 나서도” 라는 말을 “언니가 안 낳았어도” 라고 곡해를 한 것이다. 그런 말이 아니었다고 전화를 걸고 편지를 보내고 용서를 빌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나의 본의와는 상관없이 자기들의 아픈 상처가 덧나서 그러지는 않았을까 스스로 위로해 본다.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고 한다. 말이 거칠어 질 뿐 아니라 다들 남의 말은 건성 듣고 자기 말만 하려 한다. 특히 내가 그렇다. 신나게 혼자서 말을 하고 난 후엔 항상 후회가 뒤따르고 뒷맛이 쓰다. 경청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들은 귀는 천년이요, 말한 입은 사흘이다”라는 옛 말이 있다. 새해에는 말조심은 물론이고 말은 적게 하고 상대방의 말은 집중해서 듣는 훈련을 해야겠다. 연말까지가 아니라 죽는 날까지 꾸준히 노력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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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광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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