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선생님이 쓰러지셨다. 레드우드같이 곧고 멋진 분이셨다. 관상동맥 수술의 후유증 때문에 넘어지시면서 머리를 벽에 부딪쳤다. 다행히 의식은 명료한데 목뼈에 큰 손상이 갔다. 응급 수술을 받으셨지만 손발에 마비증세가 심해 재활원으로 옮기셨다. 약한 숨소리에 실린 심장박동을 들으며 나는 선생님 병상 발치에 하염없이 앉아있다.
문득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란 노래가 떠올랐다. “이제와 새삼 이-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곳이 비어있는/ 내-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상실의 노래였다. 다시 못 올 젊음과 낭만을 애타하는 이 소절이 친숙한 넋두리처럼 귓가에 울린다. 혹여 선생님을 잃을까봐, 더 악화되실까봐 숨죽여 우는 내 속울음처럼 가슴에서 떠나질 않는다.
C 선생님과는 근 20년 가까이 지냈다. 내가 닮고 싶은 인생의 큰형님 같은 분이셨다. 6척 장신에 항상 청년같이 꼿꼿한 자세와 웨이브진 머리칼과 잔잔한 미소를 지니셔서 우리는 미남배우 ‘리처드 기어’라고 불러드렸다.
선생님은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온 10가족 모임의 좌장이신데 자상한 배려와 사랑으로 멤버들을 돌보셨다. 궂은일은 도맡으시고 매사에 솔선수범하셨다. 모임의 가족들은 매달 쌈짓돈을 차곡차곡 모아 이태마다 그의 인솔 하에 오대양 육대주를 누볐다.
12년 전 중국일주를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베토벤을, 찰스브루크에서 모차르트를 함께 만났다. 다뉴브에 배 띄우고 왈츠를 추었고 잘 익은 포도주를 서로 권했다. 이베리아 반도 깊숙이 그라나다에서 알함브라의 궁전을 함께 거닐었고, 포르투갈 땅끝 호카 곶에서 콜럼버스가 탄 산타마리아호를 배웅했다.
이태 전 터키 여행땐 에베소에 들러 사도요한이 모신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집을 심방했다. 그리고 기암괴석의 땅, 카파도키아와 파묵칼레에선 오색풍선을 타고 하늘을 날며 고함을 토했다.
세월이 흘러 우리 모임에도 병환으로 돌아가신 분, 갑작스런 병고로 어려움을 겪는 가족들이 생겼다. 그즈음 나는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한의대 등록을 감행하기로 했다. 환경 분야에서 30여년을 일해 왔는데 은퇴 후에도 가족과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고 싶었다.
은퇴를 4년 앞두고 산호세에 있는 야간 한의대에 등록했다. 퇴근 후 시간 반을 걸려 수업에 들어가면 녹초가 되었다. 그러나 점점 자연과 인간이 한 소우주 안에서 치유의 길을 찾는 한의학에 심취되기 시작했다.
은퇴 후 2년 동안 풀타임으로 학교 한방병원에서 인턴과정도 마쳤다. 햇수로 꼭 6년 만에 졸업한 셈이다. 그리고 지난 3월 캘리포니아 한의사시험에 응시했다. 무슨 전조였을까? 시험을 보러 남가주로 떠나는 날, 선생님의 사고소식을 들은 것이다. 무너지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오늘도 선생님의 병세가 별 차도가 없다. 허나 다행히 어제 한의사 시험 합격통지를 받았다. 선생님을 미력이나마 도울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것이다. 최백호는 상실된 낭만을 노래했지만, 선생님의 건강을 되찾는 치유의 노래를 불러드리고 싶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가족들의 간호, 그리고 양방, 한방의 인술이 하나가 되어 ‘회복의 낭만에 대하여’ 노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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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수필가^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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