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93세가 되시는 어머니. 서른 젊은 나이에 홀로되시어 재혼도 마다하시고 삶의 버거움을 가냘픈 양 어깨에 짊어지시고 이 외아들을 홀로 키우시며 살아오신지 어언 60여년.
남편이 남겨 놓은 유산이 없었기에 사별의 안타까운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10개월 된 나를 등에 업고 남대문 시장에서 구호물자 장사를 하셔야만 했다. 아버지가 없다는 서러움을 안주시려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미국에 유학 가셨다며 돌아가신 사실을 숨기셨다.
“그런데 왜 편지도 안 보내느냐”고 집요하게 묻던 어느 날, 자초지종을 말씀해 주실 때 눈가에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어머니의 눈물을 볼 수 있었다. 6세 때로 기억을 한다. 시장에서는 무엇이든 살 수 있는 줄 알고는 “형과 누나, 동생들을 사오라”고 졸라대면 알았다며 나를 달래시곤 했다.
아침에 시장으로 장사를 나가시며 군것질하라고 10원을 주시면 군고구마 2개를 살 수 있었다. 하나는 크고 또 다른 하나는 작은 것. 당연히 큰 것은 엄마오시면 드리려고 남겨 놓고 작은 것은 내 몫이었다. 때로는 큰 것에 욕심도 났지만 아니다 싶어 작은 것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동네에서 아이들과 뛰어놀다 엄마들의 밥 먹으라는 소리에 아이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외톨이가 되어 등을 대고 누울만한 크기의 돌이 있는 동네 어귀로 갔다. 여기에 누운 채 유난히도 반짝이는 별을 보며 도착과 출발을 알리는 전차의 경음을 들었다.
“엄마가 저 전차를 타고 오셨다면 이쯤 오셨을 거야”라고 가늠하며 세기를 수차례 반복하다보면 어느 사이 잠이 들곤 했다. 장사를 마치고 귀가하시는 엄마는 으레 이곳으로 와서 잠든 나를 안고 집으로 가시곤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재봉틀 발판을 본다. 어김없이 초콜릿이 놓여있다. 냉장고가 있을 리 없는 우리 집 형편에 녹지 않은 초콜릿을 먹이려는 엄마의 지혜였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여행갈 때나 부득이 집을 비워야할 때는 조그만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갖고 다녔다. 당시 나는 동양방송국 근처에 살았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라디오를 켜고 엄마가 방송국 근처에 계실 텐데 하며 보고픔을 달래곤 했다.
그렇게 60여년이 흘러 이제는 연로하고 허약해지신 모습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나를 위해 고생하시며 살아오신 일생. 그런 어머니에게 틀니가 망가진다고 좋아하시던 갈비를 드시지 말라고 핀잔을 하고는 밤새워 울었을 때도 있었다. “어릴 적 김치가 맵다고 하면 물로 헹궈서 주셨는데.... 갈비를 씹어서라도 먹여 드려야 했는데”라는 자책과 후회 때문이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어머니의 방문부터 본다. 문틈사이로 불빛이 보이면 정말 기분이 상쾌해진다.
성경을 읽으시며, 찬송가를 부르실 때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해도 피곤치가 않은 것 같다.
간혹 불이 꺼져 있고 찬송이 안 들리면 왠지 불안하다. 혹시 어디가 편찮으신 것은 아닌가?엄마, 난 아직도 어머니 보다 엄마라고 부르는 게 더 좋다.
엄마, 우리 건강하게 오래 살자. 엄마 사랑해.
<
장주철 풀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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