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있어서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추억’이라고말하고 싶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만의 추억의 창고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지난 과거의추억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으며,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그 중 하나를 골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삶의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생산해내곤 한다.

사실 추억이라고 해서 다 별스런 건 아니다. 어떤 경이적인 감동의 순간들만이 그 창고의 중심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 법은 없다. 창고라는 데는 사실 먼지 수북이 쌓인 폐품들이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곳이 아니던가. 찬바람 씽씽 들어오는 문풍지와 함께했던 어린 시절의 기나긴 겨울들, 금방이라도 귀신 뛰쳐나올 것같은 변소가 있는 집, 오늘도 등굣길에 그 여학생과 조우할 수있을까 하며 두근거렸던 까까머리의 내 마음 등, 추억이란 바로이런 소소한 것들을 먹고 자라는생(生)의 비타민이다.

그 중, 나를 포함해 모든 자녀된 자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추억거리는 부모의 잔소리일 것이다. 부모의 잔소리는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어른이되면 그 소리는 여전히 귀에 쟁쟁하다.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닌 꼭 들어야 할 소리로 바뀐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부모가 되어 그비슷한 잔소리들을 내 자녀들에게 똑같이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부모의 잔소리는 내인생의 중요한 추억 중 하나인 셈이다.

내 아버지의 잔소리는 두 가지였다. “형제지간에 우애해라”와“너의 행선지를 꼭 알려라”였다.

아무튼 이 소리를 얼마나 많이들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셔서도 손주들에게 그 똑같은 잔(!)소리를 하셨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손주들이 총 10명인데, 걔들도 할아버지의 이 잔소리를 듣고 자랐다.

특히 형제지간에 우애하는 것에대한 강조는 아주 특심했다.

그 손주들이 이번에 모였다. 물리적으로 한 곳에 모인 게 아니라 카톡 공간에 모였다. 할아버지의 임종 직전에 할아버지의 잔소리를 기억하자며, 잔소리의 주인공이신 할아버지의 마지막 길에 자기들이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주자며,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들이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음을 표현하자며 모였다. 그리고 급하게 비디오 하나를 만들었다. 각자 자기에게 해주셨던 그잔소리가 고맙다며, 할아버지께자기의 사랑을 고백하는 25분짜리 동영상이다.

오늘 새벽 2시까지 열심히 만든 동영상을 들고 시애틀에 있는두 큰손녀들이 할아버지께 급히달려갔다. 손주들의 의기투합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그런데 3월3일 월요일 오후 4시 50분에 할아버지는 손주들의 사랑 고백을들으며 고이 잠드셨다.

참 감사한 순간이었다. 이런 손주들의 부모인 우리 사남매는 이런저런 바쁘다는 이유로 아버지께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게 사실이었는데, 우리의 자녀들인 걔들이 순식간에 하나가 되어 아버지(할아버지) 가시는 마지막 길에아름다운 동행을 대신해 준 것이다. 우리가 낳았지만 참 착하고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쓰는 때는 아버님의부음 소식을 들은 지 네 시간이지난 지점이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또 손주들에게 가족의 중요성을, 그리고 형제자매들간의 우애의 중요성을 이렇게 알려 주고 가셨다. 그리고 그것을 목격하고 가셨다. 이젠 남은 우리에게 할 일이 하나 생겼다. 아버지의 잔소리,할아버지의 잔소리, 이제 몸과 삶으로 실천하는 일이다. 남은 우리들끼리 우애하는 그 일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