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은 1931년 경남 합천에서 6남4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어릴 때 두 형은 사고로, 동생 하나는 병으로 죽어 형 기환과 동생 경환, 그리고 누이들만 살아남았다. 전두환의 어머니는 자식들 중 전두환을 특히 아껴 지나가던 중이“당신 앞니가 아들 출세 길을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즉시 부엌으로 달려가 생니 3개를 뽑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 덕인지 전두환은 육사에 들어가 승승장구한다. 성적은 바닥을 기었지만 정치적 감각은 어린 시절부터 뛰어났다. 1961년 5.16이 일어나자 육사 생도들이 먼저 이를 지지해야 한다며 동료들을 끌고 나와 가두시위에 앞장섰다. 당시 육사 교장이던 강영훈이 생도들을 만류하자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밀고해 즉시 체포하게 만든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사건 스승이건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그의 모습은 이 때부터 드러난다.
어쨌든 그는 이 일로 박정희 마음에 단단히 들어 출세에 출세를 거듭한다. 박정희가 그를 국회에 보내기 위해 국회의원 출마를 종용하자 그는“군대에도 각하에 충성하는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답변한다.
그러다 1979년 10.26이 터지자 그는 재빨리 합수부장 자리를 꿰차고 김재규를 체포하며 내친 김에 12.12 사태를 일으켜 육군 참모총장이자 자신의 상관이던 정승화를 체포한다. 이 과정에서 하극상에 반대하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부관 김오랑 소령 등이 흉탄에 맞아 숨졌다. 정병주와 역시 쿠데타에 반대하던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강제 예편되고 정병주는 몇 년 후 초라한 노인으로 전락해 야산 나무에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된다.
그러나 전두환 일생의 최대 범죄이자 6.25이후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비극은 1980년 5월18일 일어났다. 전두환 독재에 반대하는 광주시민들을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 진압한 광주 학살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163명이 죽고 166명이 행방불명 됐으며 3,139명이 부상당했다전두환은 퇴임 후 내란죄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상급심에서 무기로 감형됐으며 그나마‘국민 화합 차원’에서 곧 사면돼 석방됐다. 1995년 유죄 판결과 함께 2,205억의 추징금도 부과됐지만 현재까지 532억만 낸 후 “29만원밖에 없다”며 나머지 돈을 내지 않고 호화 골프 여행 등을 즐기고 있다.
그 전두환 자택에 16일 검찰이 들이닥쳐 미술품을 압수하고 재산 은닉 자료들을 수거해갔다. 검찰은 그의 아들 전재국 소유 시공사 등 17개 곳도 압수 수색했다. 전두환의 아들들은 별 다른 돈 벌이 기록도 없으면서 수 백 억 대 재산을 굴리며 떵떵거리고 살고 있다. 그런데도 검찰은 이들에 대한 수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최근 통과된 소위‘전두환 법’에 따라 전두환은 물론 그 가족과 관련자 재산을 조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두환의 형 기환은 인사 청탁 등 각종 특혜에 개입했다 기소됐고 동생 경환은 사기, 배임, 횡령 등 여러 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구속 수감됐지만 형 집행 정지로 감옥 생활을 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수많은 죄를 저지른 인간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대한민국에서 정의를 이야기 하는 것은 우습다. 지금이라도 이들 형제들을 감옥에 보낸 후 다른 일을 논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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