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와 관련 샌프란시스코 인근 지명이 가끔 뉴스에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중 생소한 이름이 있다. ‘새너제이’가 그것이다. 미국에 오래 산 한인들 가운데서도‘새너제이’라는 지명을 들어본 한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지명의 영어 명을 확인 해 본 결과‘San Jose’의 한국어 표기임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 사는 한인 가운데 이곳을‘새너제이’로 읽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미국 사람들 발음을 염두에 둔 것 같은 데 그렇더라도 최소한‘샌 호제이’라고 써야 한다.‘샌’과 ‘호제이’는 분명 두 단어인데 이걸 한 단어인양 붙여 써놓으니까 영어 원문을 추측할 수 없는 괴물 같은 단어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원어민 발음을 중시한다면‘산타 클로스’도‘새너 클로스’라고 써야 한다. 미국인 가운데서‘Santa Claus’를‘산타 클로스’라고 발음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현행 외국어 표기법은 현지인 발음을 꽤나 중시하는 것 같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슈퍼마켓’ ‘슈퍼맨’ 등‘super’가 들어간 경우다. 미국에서는‘슈퍼’가‘수퍼’로 바뀐 지 수 십 년이 지났지만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일관되게‘슈퍼’로 쓰고 있다. 일부에서는‘슈퍼’는‘라디오’처럼 관용화된 외래어이기 때문에 그렇게 써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렇다면‘Super Bowl’은 어떻게 써야 할까. 이는 엄연히 미국에서 열리는 연례행사다. 당연히 원어민 발음에 가깝게 써야 하고 그렇다면‘수퍼 보울’이 맞다. 그럼에도 아직 한국에서는 이를‘슈퍼볼’로 쓰고 있다.
이런 발음 표기의 무원칙보다 더 거슬리는 것은 영어의 원 뜻을 생각하지 않고 단어의 겉모습만 보고 번역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고객 충성도’라는 말이다. 이는 영어 ‘customer loyalty’의 직역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제품에 대해 충성을 바치는가. 제품이란 소비자가 쓰다 버리는 물건이지 충성의 대상이 아니다. 딱 번역할 단어가 없으면 억지로라도 그렇게 써야겠지만 바른 우리 말 번역이 있다.‘고객 애착도’가 그것이다. 여기서 말하는‘loyalty’는 고객이 그 제품에 애착을 느낀다는 뜻이지 충성을 바친다는 뜻이 아니다. 그걸‘loyalty=충성’ 식의 고등학생 수준의 번역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하다.
이런 일차원적 번역은 언론에 국한되지 않는다. 가장 엄밀한 번역이 요구되는 철학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플라톤의 주저‘Apology’를‘변명’이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이 책의 그리스 원명은‘ απολογια’다. 영어로 그대로 옮기면 ‘apologia’가 된다. 영어나 그리스 단어에는‘변명’이란 뜻도 있지만‘변론’이란 뜻도 있다. 변명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핑계를 대는 것이지만 변론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청소년 타락 및 신 모독 혐의로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그린 플라톤의 이 책을 읽어보면 내용이 ‘변명’이 아니라‘변론’임은 너무나 명백하다.
한국에 그리스 철학이 소개된 지 100년을 바라보는데 아직도 이런 번역이 횡행한다는 것은 실망스럽다. 한국 외국어 표기법 당국자와 언론, 학계의 반성이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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