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생명의 계절이다.
계사년 새해를 맞은 지 어제 같은데 그새 1월을 보내고 2월의 허리를 꺾고, 우리의 설도 지나가고 얼었던 대동강이 녹는다는 우수도 엊그제 지났다. 아스라이 계절은 봄을 몰고 온다. 매년 맞는 봄이지만 근래 맞는 봄이 내게는 더 반갑고 고맙게 느껴진다.
거의 매일 아침, 우리 아파트 부근 콜롬비아 디스트릭 공원 주변 야산을 아내와 손을 잡고 한 바퀴 돌아오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가 시작 된다. 아침마다 숲 속 나무들이 토해내는 상큼하고 깨끗한 맑은 공기를 값없이 마음껏 심폐에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이 여간 행복하고 고마운 일이 아니다. 아직 깊은 응달엔 눈이 남아 있는데 계절은 벌써 봄 행세를 한다.
긴 겨울잠에서 갓 깨어난 봄의 물상들이, 산들거리는 봄바람이, 아기 손끝처럼 보드라운 봄의 아침 햇살이, 얼음 속을 졸졸 소리 내며 흐르는 도랑물 소리, 만물이 도약하는 봄기운이 바삐 가는 우리 발길을 붙잡는다. 마치 우리 보고, 눈빛도 맞추고, 잠깐 이야기라도 하고, 악수라도 하고 가라는 것 같다고 아내가 말한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겨우내 삭막하고 앙상하게 뼈만 남았던 가지 끝마다 참새 혓바닥만큼 한 연초록 어린잎들이 트는 소리가 들리며 여린 봄의 향취가 실바람에 실려 오는 것 같았다. 겨우내 얼었던 토양에서 초목의 영양분인 엽비(葉肥) 냄새도 알싸하게 내솟아 코끝을 간질인다.
우리는 그동안 다람쥐 채 바퀴 돌 듯 그저 별다른 생각 없이 이 산책길을 지나 다녔다. 언뜻 계절에 무심했음에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 왔다. 우리 내외는 늘 다니는 산책길에서 서너 발짝 벗어나 수풀 속을 헤집고 들어가서 싱싱 물이 오른 연한 나뭇가지와 악수하며, 여리고 연한 잎눈과도 대화하며, 나무뿌리 사이를 트고 돋아나는 이름 모를 파란 새 생명들을 어루만지며, 잠시 햇 봄을 만끽했다.
며칠 전 세차게 불어친 눈바람으로 봄이 뒷걸음 치는 것 같았으나 내킨 봄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오늘따라 더 걷고 싶은 생각에 좀 멀기는 하지만 공원 모퉁이에 있는 작은 연못을 돌아오기로 했다. 연못가에는 방금 피어난 것 같은 노란 개나리, 하얀 수선화가 군데군데 수줍게 피었고, 네댓 마리 오리가 아직 가장자리에 어름이 둘린 찬 연못 수면에 자맥질하며 유영하는 것을 보며 확실히 봄이 왔음을 느끼게 했다. 신선한 아침공기를 한 움큼이라도 더 마시려고 가슴을 활짝 펴고, 팔을 크게 흔들며 좁은 산책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주택가에 이르렀다. 울타리 없는 집집 넓은 뜰 안 양지쪽에는 동백나무와 홍매화가 포동포동 꽃봉오리가 당장 터질 것처럼 송송 매달려 있고, 성미 급한 동백꽃 몇 송이가 벌써 하얀 눈 이불 속에 빨간 얼굴을 살짝 내 밀고 적백(赤白)을 극(極)적으로 들어내 보이는 모습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귀엽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봉곳하게 붓 봉우리 모양, 쑥색 밍크코트에 곧 필 꽃잎을 감추고 있는 자목련 나무 등허리를 다람쥐 첫배 새끼들이 분주하게 까불며 오르내리는 것이 처음 맞은 봄에 신명 난 것 같았다.
봄은 소리와 색깔로 오는 것 같다. 동면했던 수목들이 수액을 퍼 올리는 소리가 해머를 둘러치는 소리 같이 힘차게 돌리는 것 같고, 봄꽃은 제각기 밝고 고운 아름다운 색깔로 회색 겨울을 지우며 산야를 미화해 준다.
봄은 꽁꽁 얼어붙었던 단절의 대지를 녹여주며 훈훈한 대화의 창을 열어주는 부드러운 계절이다. 봄은 확실히 생기 있고 희망이 있고, 만물이 소생하는 복된 계절이다. 그런데 내게는 사뭇 봄을 대하는 내 마음이 예전 같지 않는 것을 은연중에 느낀다. 그것은 아무래도 점점 나이를 먹으며 늙어 간다는 생각의 앞섬이 아닐까 하는 서글픈 생각도 든다.
양지쪽 그루터기 주변엔 지난 가을에 떨어져 말라죽은 것 같던 도토리가 제 몸통을 가르고 파란 생명의 뿌리를 땅 속에 내리며, 이름 모를 새싹들이 까치발로 앞 다툼하듯 싱싱 솟아나는 생명의 봄은 힘차게 또 다음 봄을 향해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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