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이 잘 속는 것은 노화와 관련된 뇌신경 체계의 변화 때문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노인은 잘 속는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기행각이 해가 지날수록 기승을 부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나이든 아시아계 여성들에게 접근, ‘액운’을 막아주겠다며 금품을 갈취한 일당이 체포됐다. 용의자들은 모두가 젊은 동양 여성들이었다. 첨단과학 시대에 곰팡이와 좀약 냄새를 풀풀 풍기는‘부적 사기’가 먹힌 것은 나이든 피해자들의 의식 속에 길흉화복의 예측과 예방이 가능하다는 무속신앙의 믿음 체계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잘 속아 넘어가는 것은 이번 경우처럼 뇌에 앙금처럼 고여 있는 문화적 잔재의식 탓만이 아니다.
나이 들면 시각적 위험신호 잡아내는 뇌 기능 쇠퇴
사기꾼의 수상한 외모·행동거지 제대로 판단 못해
고령자는 전화 판촉·방문 판매원 혼자 상대 말아야
새로 발표된 학술 보고서에 따르면 노인들은 사기에 유달리 취약하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뻔한 사기수법에 말려들어 노후자금을 날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미 국립과학원 회보에 게재된 보고서는 노인들이 사기범들의 ‘예금통장’으로 쉽게 전락하는 이유로 노화와 관련한 신경체계의 변화를 꼽았다.
내용을 간추려 정리하면 이렇다.
나이가 들면 신경체계에 변화가 오면서 믿음직스럽지 못한 외양이나 행동거지 등 상대방이 보여주는 부정적인 ‘시각신호’를 잡아내는 기능이 쇠퇴한다.
이같은 변화 탓에 노인의 뇌는 가시적 위험에 대해 직관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경고신호를 이전처럼 대량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노후한 ‘경보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셈이다.
수상쩍은 상대를 간파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사기를 막아낼 1차 방어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늙으면 잘 속는다’는 등식이 성립된다.
하지만 이 등식이 객관적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노화와 신경변화 사이의 분명한 상관관계부터 입증해야 한다.
연구를 주도한 UCLA는 이를 위해 23~46세의 성인 21명과 55~80세 연령범위에 속한 23명에게 60장의 인물사진을 보여주고 사진 속 인물 개개인의 신뢰성을 평가하라고 주문했다. 분류작업에 착수한 실험 참가자들의 뇌를 단층 촬영한 결과 수상쩍은 얼굴사진을 볼 때 젊은 그룹의 경우 전축뇌섬엽이라는 뇌 부위가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난 반면 나이든 그룹은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전축뇌섬엽은 타인의 신뢰성을 판단하고 사회적 상호작용과 관련된 잠재적 위험과 보상을 평가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한마디로 상대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다.
실험을 지휘한 UCLA의 심리학 교수 셸리 테일러는 “젊은 그룹의 전축뇌섬엽은 인물사진을 통해 전달된 짐재적 위험에 경고신호를 발령했으나 나이든 성인들의 전축뇌섬엽은 침묵했다”고 말했다.
UCLA 연구팀은 또 55~84세 연령대에 속한 119명과 20세에서 42세 사이의 성인 24명에게 사진 속의 인물의 신뢰도를 “믿을 만하다” “중립이다” “믿을 수 없다” 등 세 등급으로 분류할 것을 요청했다.
이들 중 일부 사진에는 맘에 없는 억지 미소를 띠거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든지 카메라에서 멀리 떨어지려는 자세를 취한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바로 이들이 수상쩍은 느낌을 들게 만드는 시각적 신호에 해당한다.
나이든 사람들은 믿을 만하다든지, 중립적인 느낌의 사람들을 가려내는데 있어서는 젊은 연령대의 참여자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수상쩍은 시각 신호를 보이는 사진 속 인물들을 접근해도 무방한 부류로 분류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에 대해 테일러 박사는 “나이든 성인들은 긍정적인 정서적 편향성을 갖고 있고 이 때문에 부정적인 신호를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전체 실험과정을 지켜보며 이른바 노인들의 ‘긍정성 효과’를 문서화한 스탠포드대 심리학과 교수 로라 카스텐센은 “이번 연구결과는 일반적으로 나이든 성인들이 젊은 세대에 비해 더욱 행복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고 말했다.
카스텐센 교수는 “이렇듯 긍정적인 면을 바라봄으로써 노인들은 많은 감정적, 정서적 혜택을 입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반대로 부정적 측면을 외면하고 긍정적 측면에 초점을 집중하는 것은 특정한 맥락 안에서 해를 가져올 수 있다. 금전사기가 그 중 하나다.
한편 프린스턴 대학 심리학 교수인 알렌산더 토도로프는 UCLA 연구결과를 “흥미롭다”고 평가하면서도 “얼굴 생김새와 표정에 바탕한 신뢰성 평가가 정확하다는 전제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연구를 주도한 테일러 박사는 거의 20여년 전 자신의 부친이 2명의 사기꾼들에게 속아 1만7,000달러의 거금을 넘긴 ‘사건’을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한다.
두 명의 남성은 그녀의 부친이 평소 알고 지내던 친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길거리에서 자신에게 접근, 수작을 부린 두 명의 사기꾼을 직접 은행까지 데리고 가서 자신의 계좌를 깨끗하게 털어주었다.
당시 목격자 진술에 따르면 2인조 사기꾼은 테일러 박사의 집 근처에 거주하던 노숙자들로 두 명 모두 옷차림새가 지저분했고 한 명은 이빨이 거의 없었다. 이들은 인근 마약중독자 재활센터를 드나들던 자들이었다.
인상착의만 보아도 도저히 신뢰감을 느끼기 힘든 부류였지만 테일러 박사의 부친은 이들이 보내는 너무나도 확실한 ‘시각적 신호’를 놓쳤다.
미국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금융사기 사건은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현재 크고 작은 경품사기의 피해자는 대부분 노인들이다. 간병 도우미나 후견인이 은행계좌를 털어 줄행랑을 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보험사인 ‘메트라이프 머추어마켓 인스티튜트’가 지난해 발표한 자료는 2010년 한 해 동안 사기를 당한 노인들이 입은 피해규모가 2년 전에 비해 무려 12% 급증한 29억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했다.
피해규모가 커지자 정부 내에서도 대응조치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올해 초 연방 정부 회계감사원은 노인들의 피해를 막을 기존 안전장치가가 적절치 못하다고 지적하고 국가 차원의 새로운 전략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개인을 대상으로 한 사기사건의 예방은 결국 개인 차원에서 시작돼야 한다.
이와 관련, 테일러 박사는 고령자의 경우 기본적으로 전화 판촉이라든지 가가호호를 찾아다니는 세일즈맨의 방문판매에 덥석 응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일단 전화를 끊거나 가족 가운데 누군가 올 때까지 기다려 이들의 의견을 들은 다음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게 올바른 순서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금전사기와 관련해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자주 찍힌다는 사실이다.
고령자들을 노리는 금전 사기사건의 절반은 이들을 돌보아주기 위해 고용된 관리인이라든지 친구로 위장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테일러 박사는 나이든 친척을 돌보아줄 사람을 구할 때에는 신원조회를 철저히 하고 평소 보지도 듣지도 못한 친구가 갑자기 나타나면 일단 경계태세를 취하라고 조언했다.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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