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할렘 PS 57 초·중학교 과학교사)
"선생님, 안녕하세요? 김은주예요. 제가 너무 일찍 전화 드렸나요?”
얼마 전 어느 이른 아침에 난 내가 평소 존경하는 한국어 교육의 대모인 뉴욕한국학교의 허병렬 선생님께 다급히 전화해서는 "오늘 한국일보에 나온 ‘한국어’에 관한 선생님의 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라며 대화를 시작했다.
난 초등학교 때 이민을 와서 한국어를 거의 잊고 있다가 대학시절 한국 유학생 및 갓 이민 온 한인 학생들과 어울리면서 한국어를 되찾은 경험이 있다. 그리고 사회학 전공자로서 당시 또래 학생들과 한국역사와 문화, 미국역사와 문화, 정치 등을 토론하며 내겐 외국서적과도 같은 어려운 한국어로 된 논문을 읽고 또 읽으며 초등학교 시절 잃어버린 한국어를 다시 되찾은 셈이다. 때문에 내겐 한국어나 한국문화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기에 귀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어가 때로 ‘뒤죽박죽’ 이상하게 변하는 것에 민감해지고 때론 내 마음을 다치기도 한다.
최근엔 어느 언론인과 이런 논쟁을 한 적도 있다. 한국어로 ‘힘내라! 잘해보자’라는 좋은 말이 있는데 한국인들은 거의 무조건 ‘화이팅’을 쓰는데 영어로는 ‘투쟁한다’는 파이팅을 굳이 써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그 언론인은 나름 설명하려 애썼지만 나를 설득시키지는 못했다. 이어 시카고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후배 교사에게도 ‘화이팅’의 근원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후배 교사는 ‘FIGHTING’의 일본어 발음을 한국에서 받아들인 결과로 알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식민지를 경험한 세대가 무섭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직도 우리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에는 일본식 발음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일본식 발음 뿐만 아니라 미국에 사는 한인들의 영어사용도 잘못된 것들이 많다. 식당에 가서 "테이크아웃(Take Out) 하려고 하는데요"라고 말하면 거의 대부분은 못 알아듣는다. 한참 후에야 “투고(To Go)요?"라고 되묻는다. 대체 "투고"라는 말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말도 안되는 영어를 한인 식당과 한국 식당에서는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 것일까? 허병렬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한국에서는 우유를 ‘밀크’라고만 한데요. 그래서 우리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우유를 ‘밀크’라고 가르쳐야하는지 우유라고 가르쳐야 하는지 참…"이라고.
나는 평소 외래서 사용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터라 한글 ‘ㄹ’을 가르치며 제시하는 단어를 리본, 라디오, 레벨 등으로 가르치는 방식도 이해할 수 없다. 문득 평소 존경하는 한 문학인의 말이 생각난다. 옛날에 주시경 선생이 한문대신 한글을 많이 쓰자는 글을 동아일보에 실었는데 당시 쓰인 글의 상당 부분이 한문이었다고.
아침에 배달된 신문에서 허병렬 선생님의 글을 읽고 난 뒤 깊은 생각에 빠졌다. 왜 자기 것을 갖고 있는데도 남의 것, 남의 말을 그렇게 좋아할까? 이래서 언어·문화 식민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인가? 일제 시대 때 우리나라 말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게 하고 이름도 일본 이름으로 강제로 바꾸도록 억압받았으면서도 한국민족은 왜 그리도 외국어 사용을 선호하는지, 내 것을 갖고 있을 때 귀하게 알고 지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난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어린 학생들이 영어는 물론이고 자신들의 언어와 영어를 섞지 않게 잘 구사하며 사용하는 것을 인상 깊게 지켜본 기억이 있다.
반면 한국인들은 모국어인 한국어와 엉뚱한 외국어를 섞어서 잘못 사용하는 행태가 갈수록 심하다. 그렇다면 일제 식민지에 이어 미국의 영향권에서도 언어적으로 벗어나지 못한 때문일까? 자칫 미주 한인사회도 앞으로 50년이 지나면 우리의 한국어가 완전히 ‘뒤죽박죽’인 외계인의 언어로 변질되고 마는 것일까? 걱정이 앞서게 된다.
학교에서 내가 가르치는 다인종 학생들은 내가 자신들의 부모가 사용하는 모국어를 사용하면 참으로 좋아한다. 예를 들면 ‘Water, Agua, Right?’라고 말하면 박수까지 치며 좋아한다. 그러면 난 한국어로 ‘물’이라는 단어를 가르쳐주곤 한다. 이후 복도에서 학생들을 만나면 "What was Water in Korean?"이라고 물어본다. 학생들은 즉시 "물"이라고 대견스럽게 대답한다. 잃어버리지 않고, 빼앗겨 보지 않고도 우리나라의 말과 언어를 올바르게 사용하고 귀하게 간직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말과 언어를 존중하는 것은 민족의 자존감을 지키는 것이다. 한국어를 한 번 잃어버렸다 되찾은 내게있어 모국어는 엄청 귀하다. 한국어는 내게 두 말 할 것 없이 필수적인 언어와 대화의 도구가 됐다. 딱딱하고 객관적인 글을 쓸 때에는 영어가 편하지만 정서적인 표현은 영어보다 한국어가 훨씬 편하다. 이것 역시도 내가 늘 주장하는 ‘한국의 정서’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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