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바람은 추억의 계절임을 일깨워준다. 단풍은 불타듯 붉은 산을 포근히 감싼다. 철따라 열매 맺는 진솔한 하늘 위로 갈매기 소리에 시심(詩心)은 속 타듯이 뜨거워진다.
고향 떠나 반백년에 돌아갈 길 없으니 절망이다. 평안북도 영변이 내 고향이다. 지금은 핵무기 시설로 공포의 땅이 되었지만 역사 도시로 원명은 밀운이다. 내 청운의 꿈이 중단된 곳이기도 하다. 4대문이 동서남북에 있고 청산강과 구룡산을 건너 약산에는 철요성이란 벽을 쌓아 올려서 마치 뚝배기 오지그릇 같이 생긴 고을이다.
천주사는 1683년(숙종 9년)에 창건된 사찰이다. 재북 보물 17호로 자랑스런 문화유산 사찰이다. 건축 양식이 특이하여 두리 기둥위에 대포장치(18개) 등 군사기지의 건물 양식을 갖추었다. 북쪽 오랑캐 침략 방어와 국내의 민란 제압에 사용된 기록이 있다.
약산의 아름다움은 수려한 경관이다. 사람을 축복하고 변화시키는 영험한 산으로 부른다. 올라갈 때는 오빠, 동생 하다가도 내려 올 때는 여보, 당신이라 하여 얼굴색이 진달래 빛이 된다는 전설의 명산이다. 그러나 ‘날 버리고 가신 님이여 붉게 타오른 진달래꽃을 잊지 마오’라는 하소연도 숨겨져 있다.
시인 김소월도 천주사 망원대(1922년)에서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님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를 읊어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 시향(詩香)이 지금도 그윽하다.
가을밤이면 약산 등성에 올라 거북 등에 업힌 채 해발 480미터가 넘는 발치 아래의 흰 구름을 잡는 꿈을 본다. 그리운 고향은 생생하다. 낯익은 고향 사람들 모습은 보이지 않고 타향 사람들이 흉측한 핵 생산기지에서 미제 타도를 외친다. 평온하고 고요하던 고향이 악마의 소굴로 변한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통치시절에 나는 초등학교 4학년생(1939년)으로 효성스런 어린이였고 아버지는 ‘김학준 백화점’을 운영하셨다. 매우 춥던 정월 어느 날에 절세미인 선생님이 부임하셨다. 몸매와 교양이 월등하신 처녀 선생이 미국 선교사가 설립한 남녀 공학 중학교인 숭덕학교로 오신 것이다. 나중에 선생님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별명을 ‘공산명월’로 정했다.
숙소가 정해질 때까지 선생은 임시로 우리 집에 유숙하시게 되었다. 한 가족 같이 지내면서 정은 깊어졌다. 선생님이 학교 기숙사로 옮기는 날에는 가족 한 사람을 잃은 듯 서운했다. 선생님은 감사하게도 매주 시간을 내시어 방문해 주셨다.
선생님은 어느 날 다음 토요일 저녁 무렵에 약산 천주사에 데려다 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시어 어머니께서 “모셔다 드리거라”고 허락하시었다. 나는 신나게 토요일만 기다렸다. 4월 말의 비는 줄기차게 사흘을 계속해 왔으나 즐겁기만 했다. 먼 길을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우산 속의 둘은 팔을 끼고 소낙비를 흠뻑 맞으며 흐뭇함과 야릇함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스님의 안내로 보광전 옆 망월대의 한 칸 방 앞의 ‘묵언(默言)중’이란 표시(현재의 기도실, 수도실) 안에서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수필가, 소설가인 김소운 작가였고 두 사람은 뜨겁게 포옹했다. “사랑이 무엇이길래! 여기까지 오셨구나”라며 중얼거렸다. 인내가 대단하셨구나.
우주가 초록빛에 젖은 듯이 떡갈나무 잎새에 떨어지는 빗물소리가 내 맘을 울렸다. 문 닫히는 소리에 나는 깨달았다. 세상에 보이는 것은 보아야 하고, 귀에 들리는 것은 소리가 있어야 하며, 생각나는 것도 증거가 있어야 진실이다. 무언(無言)중에 유무(有無)를 깨달았다.‘공산명월’이 새삼스러웠다.
추억 속의 가을바람과 꿈속에 속삭이는 옛 추억이 새삼스럽다. 꿈을 먹고 사는 인간이기에 환상도 아름답다. 마음의 고향은 영원하다.
김해남
랜햄,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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