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대학에 다니고 있는 둘째 아들 녀석이 봄방학이라고 다녀갔다. 1월말에 겨울방학을 마치고 학교에 돌아간 후 첫 방문이었으니 두 달 만에 보게 된 셈이었다.
필자의 둘째 아들은 한국말이 서툴다. 물론 자랑이 아니다. 어휘력도 미천하지만 발음도 우스울 때가 많다. 이번 방학에 왔을 때 한 식당을 찾았다가 영문으로 ‘Cheogajip’이라고 되어있는 식당이름을 ‘치오가집’이라고 읽는 바람에 웃고 말았다. 물론 제대로 발음을 했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특히 ‘가’와 ‘집’이 같은 의미라는 것은 얘기를 해주어도 이해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원치 않은 둘째 아들의 발음을 들으면서 얘가 고등학교 때 겪었던 일화가 생각이 났다. 10학년을 마치고 여름방학에 수퍼마켓의 식당가에서 캐쉬어로 일했던 적이 있었다.
계산대 뒤에 서서 손님으로부터 음식주문을 받아 큰소리로 주방에 불러주고 주방에서 음식이 준비되어 나오면 손님에게 돈을 받고 내어주는 것이 맡은 임무였다. 한식과 중식을 모두 제공하는 이 식당의 당시 주방장은 화교출신이었는데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되어 영어가 좀 서툴렀다. 필자의 둘째 아이는 한국말이 서툴렀기에 둘 사이에 서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둘째가 주방장과 크게 다투고 집에 돌아왔다. 음식 주문관계로 그랬다는 것이다. 둘째 말로는 주방장이 자기가 주문한 내용을 잘못 들어 놓고 자신 보고 주문을 잘못 넣었다고 화를 냈다는 것이다. 이에 본인도 화가 나서 말대꾸를 했다고 한다.
그날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음식은 불고기 덮밥이었다. 손님이‘파’없이 준비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큰소리로 “불고기 덮밥, 파 없이요”라고 주방에 주문을 넣었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음식이 나왔을 때는 파는 그대로 있고 대신 밥이 없이 나왔다는 것이다‘파’가‘밥’으로 들렸던 것이다. 이쯤에 이르러서는 얘기를 듣고 있던 필자는 박장대소를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둘째의‘파’발음이 분명히 제대로 안 되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둘째의 논리는 확실했다. 불고기 덮밥을 주문했는데 ‘밥’이 없다면 그게 불고기이지 어떻게 불고기 덮밥이냐는 것이다. “밥 없이요”라고 들렸다면 당연히 이상하다 생각을 하고 자신에게 주문내용을 확인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한 사람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발음이 나빠서 잘못 전달이 되었더라도 그렇게 화를 내고 야단칠 일은 아니라는 것이 둘째의 주장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주방장과 캐쉬어 사이의 말다툼을 목격하던 손님이 그냥 밥만 한 그릇 주면 안 되겠느냐는 절충안을 제시해 손님 문제는 해결했지만 주방장과 둘째는 그 시점으로 서로 돌이킬 수 없는 나쁜 관계에 돌입하고 말았다.
결국 수퍼마켓 주인 입장에선 주방장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둘째를 마켓 내의 다른 자리로 전출시키는 것으로 이 분쟁(?)을 종식시켰다.
어렸을 때 한글학교에도 열심히 다니며 한국말을 제법하던 둘째가 초등학교 어느 때서부터인가 운동에 더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한글학교를 못 가게 되었다.
부모나 할아버지, 할머니와 한국어로 대화는 시간보다 형이나 친구들과 영어로 대화하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아지고, 학교에서 어려운 영어어휘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한국어 구사 능력은 점점 더 쇠퇴하기 시작했다. 한국어 공부에 제대로 관심을 유지 못 한 것은 필자를 비롯해 본인도 자못 후회하는 부분이다.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 확인과 이에 대한 자긍심 유지를 위해 언어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경제력과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생각해 볼 때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면 자신의 커리어 개발에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은 본인도 한국어 공부에 대한 필요를 느끼고, 언젠가 한국에 가서 일정기간의 시간을 보내면서 언어와 문화, 전통 그리고 역사를 정식으로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늦었지만 조금은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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