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한국에는 전에 없던 낯선 ‘공간’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직장동료며 친구들이 우르르 한 방에 들어가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나오는 특이한 유행이 움트고 있었다. 92년 4월 한국의 칼럼니스트 이규태씨는 이렇게 썼다.
“근간에 노래방이 열병처럼 번지고 있다. 혼자 가건 짝지어 가건 돈 내고서 실컷 노래 부를 수 있게 돼 있는 밀실화된 신종 노래공간이다.”
열풍처럼 몰아치던 새로운 현상에 대해 그는 한국인들이 “부풀어 오르는 한과 원을 노래로 흘려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저마다 가슴 속 답답함을 한바탕의 열창으로 쏟아냄으로써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이 신종 공간의 매력인데, 이러다 곧 수그러들지 않겠느냐는 것이 당시의 진단이었다.
하지만 ‘반짝’ 유행의 하나로 보였던 ‘노래방’은 올 4월로 만 20살이 되었다. “노래방 없었을 때는 뭐하고 놀았을까?” “노래방 없었을 때는 어디 가서 2차를 했을까?” 싶게 노래방은 한국인들의 삶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한국인 식탁에 김치가 빠지지 않듯이 한국인의 놀이문화에 이제 노래방은 빠질 수 없는 확고한 항목이 되었다. 기억에 남는 추억들 중에서 노래방에 얽힌 추억 한 두 가지 없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남가주에 사는 30대 중반의 한 전문직 여성은 한국에서 고교 시절 동전 들고 노래방에 가던 추억이 있다.
“노래방이 처음 생겼을 때는 500원 짜리 동전을 넣고 노래를 불렀어요. 노래 한번에 500원이니까 굉장히 비쌌지요. 노래방 마다 동전을 잔뜩 담은 바구니가 있었어요. 손님들이 돈을 내면 동전을 한웅큼씩 바꿔 줬지요.”
동전을 사용하던 최초의 노래방 기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년 전 부산에서였다. 노래방 업주들의 모임인 전국 노래연습장 협회 사이트에 소개된 ‘노래 연습장의 역사’를 보면 1988년 영풍전자가 세계 최초로 컴퓨터 전문 음악연주기 개발에 성공했다. 이어 부산 로얄전자의 도움으로 자막기가 개발되면서 영상과 가사가 나오는 현재의 노래방 기기의 첫 모델이 탄생했다.
그때가 1991년 4월. 대중의 반응을 보기 위해 부산의 동아대학 앞 오락실에서 처음 시험적으로 선보였는데, 청소년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그래서 다음 달인 5월 부산의 광안리 해수욕장에 하와이비치 노래 연습장이 등장한 것이 한국 최초의 노래방이었다.
이후 노래방 열풍은 전국을 달구면서 1년 만에 노래연습장 수가 1만개소를 넘었다. 열풍은 태평양을 건너 미주한인사회에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남가주에서 노래방이 붐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중반쯤부터. 이민 1세들이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며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는 데 노래방만한 곳이 없었다.
근년 노래방의 분위기는 상당히 바뀌었다. 주말 저녁에 웬만한 노래방에 가보면 고객의 절반 은 타인종이다. 타인종 젊은 층이 한인타운에 와서 코리안 바비큐로 식사하고 노래방 가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한류의 중심공간으로 노래방이 한몫을 하고 있다. 노래방의 역사는 계속 이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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