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태어난 뒤 24년간 ‘해외동포’라는 말은 TV와 신문을 통해서만 접했다. 해외동포 700만 시대, 20시간 넘게 걸려 미국 중서부 시골마을로 어학연수를 왔을 당시에야 막연했던 그 단어의 의미를 체험할 수 있었다.
인구 15만의 전형적인 중서부 시골마을인 인디애나 미샤와카. 광활한 평원에 산 하나 없는 동네를 보며 당시 문화적 충격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시골마을에도 해외동포 ‘한인’들은 둥지를 틀고 있었다.
LA에서는 대형 한인마켓이 많지만, 그 곳은 허름한 창고 안 한인 식품점이 유일했다. 두 달이 지나서야 품에 안게 된 15달러짜리 ‘김치통’의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후 ‘징하게’라는 사투리처럼 한인은 미국 어디를 가도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를 생각하며 지금도 외진 미국 동네를 지나다가 한인을 볼 때면 ‘저 집은 어떤 사연을 갖고 있기에 여기까지 왔을까’ 되묻는다. 한반도를 벗어난 한인 가족사를 적는다면 어느 집인들 눈물 쏟을 이야기가 없을까. 구한말 이후 100여 년 동안 자의든 타의든 한반도를 떠난 한인의 삶은 ‘흩어짐의 연속’이란 한을 담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최초 대규모 한인 유랑인 고구려 멸망(668년) 당시 20만명에서부터 고려시대 몽골침략 후 수많은 여인들, 조선시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나라가 큰 화를 겪은 이후 한인은 여지없이 나라 밖으로 흩어졌다. 해외동포 700만이라는 숫자도 구한말 나라 망할 때 세계 각지로 흩어진 한인 이민 선조를 뿌리로 둔다. 유대인 디아스포라 못지않게 한인 디아스포라가 기구하고 슬픈 이유다.
올 들어 ‘조선족’이라 불리는 중국에서 태어난 한인을 자주 만났다. 미국 한인과 동시대 이민선조를 둔 이들은 “한인이란 자부심으로 남가주에서도 열심히 살자”고 서로를 다독인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남한이나 북한에서 연변 지역으로 건너왔다는 ‘한인 3ㆍ4세’. 미국 한인 2세들이 한국어를 잃어버리는 것과 달리 이들은 한국어로 ‘뿌리’를 유지한다. 그 덕에 해외 최대 한인사회인 남가주 한인타운을 첫 이민 정착지로 삼아 삶을 꾸려간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고 했다지만 한인 이민자에게 한국어는 서로를 묶어주는 확실한 끈인 셈이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계속되고 있다. 바람이 있다면 각자의 이야기를 간직한 해외 700만 해외동포의 ‘조국애’가 한반도 평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으면 한다. 통일 같은 한반도 안정은 이민 이유 중 ‘슬픈 흩어짐’은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부러울 것 없는 남가주 한인사회도 타국에서 오는 한인 후손을 포용하는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남의 나라에서까지 ‘편견에 따른 차별’로 상처받는 한인이 생겨서는 안 된다. 이민자에게 한국어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잊지 않게 해주는 만큼 한글 교육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다.
김형재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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