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소변기는 누렇게 찌든 얼룩과 코를 찌르는 악취 속에 곤혹스러웠고 좁은 사무실에는 ‘가리방’으로 불리는 등사판과 싸구려 갱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70,80년대 민주운동을 하던 사람의 사무실 풍경을 묘사한 글이다.
시국사건이 터졌다 하면 밤새 등사판으로 성명서를 만든다. 그리고는 꼭두새벽에 그 성명서 전단을 벽에 붙인다. 경찰의 눈을 피해가면서. 그 당시 민주화 운동의 현실이 이랬다.
‘최초에 등사판이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러니까 상해 임시정부도 이른바 ‘가리방’을 긁어 신문을 냈다. 왜정시대는 물론이다. 비교적 최근인 군사정권시절까지 언론이 통제된 상황에서 등사판은 한국에서 진실을 알리는 거의 유일한 미디어 역할을 했었다.
1979년 5월14일자였던가. 한국의 한 일간지는 ‘카세트 혁명’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이란 혁명을 카세트 혁명으로 명명했던 것이다. 신문, 방송 등 제도권 언론은 모두 통제돼 있었다. 그 상황에서 카세트테이프가 진실을 알리는 미디어 역할을 했다.
이른바 호메이니혁명으로, 38년간 지탱해오던 팔레비 왕정은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전파된 진실과 회교혁명 이데올로기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 다음에 온 것이 팩시밀리다. 상황은 시시각각 긴박성을 더해가고 있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중국의 대학생들은 상황 상황을 팩시밀리를 통해 서방에 알렸다. 1989년 천안문사태 때의 정황이다. 그러나 팩시밀리 혁명은 중국공산당의 유혈진압과 함께 불발로 끝났다.
그리고 2년 후 소련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개혁개방을 반대해온 공산당 강경파 간부들이 국가변란을 기도한 것이다. 소련은 과거로 회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팩시밀리가 있었다. 팩시밀리를 타고 진상이 외부에 전해졌고 옐친을 중심으로 사람들은 크렘린광장에 몰려들었다. 결국 쿠데타는 3일 만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25년 후. 첩첩산중에 있는 나라 네팔에서 한 작은 혁명이 일어났다. 가넨드라 국왕이 두 주 이상 계속된 민주화 시위에 굴복해 주권을 국민에게 돌려줄 것을 선언했다. 이 네팔의 ‘ 피플 파워’ 뒤에는 휴대전화라는 뉴 미디어가 있었다.
그리고 2011년 벽두, 전 세계의 이목은 아랍세계로 쏠렸다. 튀니지의 독재정권이 무너졌다. 그 혁명의 열기는 이집트로 번지면서 아랍권 전체가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를 가능케 했나.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뉴 미디어를 통해 국민이 진실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아랍세계가 연출한 이 ‘피플 파워’의 파노라마를 ‘SNS혁명’으로도 부른다.
예외지대로 보이는 곳이 있다. 북한이다. 그 모양이라니 마치 블랙홀 같다.
이 북한에도 그러나 변화의 물결이 감지되고 있다. 뉴 미디어를 타고 ‘한류’(韓流)가 북한 사회에 물밀듯 스며들고 있고 북한 당국은 이를 막기 위해 꽤나 곤혹스러워하고 있다는 거다.
저 멀리 북아프리카에서 일기 시작한 ‘재스민 혁명’의 향기가 북한에 날아들어 감동의 ‘피플 파워’가 연출된다. 이는 한낱 꿈일까,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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