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진눈개비가 질척이는 영하 10도권을 당당하게 지키는 어느 해 2월.
공항에 겨울옷을 맡기고 가벼운 여름옷으로 갈아입은 일행들. 나를 단장으로 7명의 단원들은 다섯 시간에 가까운 긴 시간을 cz372편에 맡긴 채 필리핀 마닐라의 센테니얼 국제공항에 내렸다.
가이드의 반가운 환영에 이어 로하스 벌리바드 도로로 들어서며 해변을 따라 펼쳐지는 야자수들이 기다란 목을 늘어뜨리고 우리를 반겨 주었다.
호텔을 들어서기 전에 시간이 남아 리잘 공원을 포함해 그 옆으로 이어진 옛 스페인 제국의 견고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인트라뮤로스라는 성벽을 둘러보았다. 인트라뮤로스는 16세기 스페인이 세운 성곽도시로서 오늘날 마닐라 시의 모태라고 한다. 당시 내부에는 스페인의 군사시설(산티아고 요새), 두 개의 대학, 수도원 교회 등이 있었으며 성안에는 지배계층만 살았다고 한다.
호텔에서 1박을 한 우리 일행은 보라카이(Boracay)섬을 향해 경비행기에 올랐다. 보라카이 섬은 마닐라에서 약 1시간의 비행거리에 있다. 7천여 개의 섬 중에서 49개의 섬에는 경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비행장이 설비되어 있어 공, 해로의 교통이 아주 편리하게 되어 있다.
산호가 부숴져 만들어진 백사장은 마치 밀가루처럼 부드러워 신을 신고 걸으면 더 불편할 것 같아 맨발로 백사장을 걸었다.
낮에도 태양의 위치에 따라 바다색이 변하지만 석양은 하루 중 최고의 향연이었다.
사람을 빨아들일 것 같은 천연색의 노을 속에 펼쳐지는 야자수의 숲. 그 사이를 쌍쌍이 걷는 사랑의 그림자들. 하늘이 내린 이 혜택 속에 갑자기 삶의 힘을 느낀다.
야자나무 아래에 석양이 가까워지면 담요 한 장씩 들은 마사지 팀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기 시작을 한다. 우리 팀은 안 하려고 했으나 그들이 생활 자체를 그 걸로 먹고 산다고 하여 적선 겸해서 받았는데, 완전히 한 가족 팀이 형성되어 함께 다니는 것이 특징이다.
연령층은 10대 중반에서 70대 초반까지인데 역시 잘하기는 할머니들이 잘하지만 시원함에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면 영 눈에 거슬리는 까마잡잡한 할머니를 보면 다시는 눈을 뜨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보라카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추억은 밤하늘의 별들이었다. 하얀 모래사장에 누워 올려다보는 별들의 마당. 이렇게 별을 못 본 것이 몇 해 만인지 헤아려 보자니 그 햇수는 별 숫자만큼이나 많아 보였다. 가끔씩 별 꼬리를 흔들며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이 고요한 밤바다 위에 소리 없이 부서진다. 너무나 아름다운 밤이었다.
3일후에 다시 마닐라로 온 우리 일행은 마닐라에서 100km 떨어진 팍상한 폭포를 관광하였다. 2인이 1조로하여 방카라고 불리는 카누를 타고 약 10,000년 전에 지진에 의해 갈라진 계곡을 거의 산꼭대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은 스릴 만점이었다. 올라가는 하류 도중에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들과 물소 떼의 낭만도 일품이지만 올라갈수록 계곡 양 옆으로 깎아지른 듯 한 절벽과 그 틈을 비집고 사는 열대 수목들이 저절로 감탄사를 나오게 한다.
참으로 하늘의 혜택을 많이 누린 나라.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국이었지만 국민의 90%가량이 천주교 신자인 나라.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나라. 산에는 열대과일들이 철도 없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라. 바다에는 수산 자원이 풍부한 나라. 관광 수입국으로 외화를 많이 벌어들이는 나라.
그런데도 집집마다 10명 안팎의 식구들이 식생활을 염려하며, 농사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관광객에만 기대 살려는 의존심이 많은 국민. 천혜(天惠)의 자원만 믿고 노력을 하지 않는 나라. 길거리에 담배 한 갑 뜯어 놓고 종일 손님을 기다리는 노파를 볼 때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취학 전 아동들이 관광객이 몰리는 시장과 음식점, 관광지 입구에서 구걸 행위도 불사하는 나라. 결론적으로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나라. 그리고 왜 노력들을 안 하고 편히만 살려고 하는지. 이 모든 과제들은 풀지도 못한 채 어느새 인천행 비행기는 마닐라 공항을 이륙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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