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전 독립하던 날이 내 평생 가장 기쁘고 중요한 날이었지. 광복이 통일로 이어지는 걸 죽기 전에 꼭 보고 싶어”
15일 광복절은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지 정확히 65년이 되는 날이다. 조국 광복을 위해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자신들의 생을 바쳤고 실제로 광복을 체험한 이도 적지 않지만 이제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 가운데 최고령 독립유공자가 LA 한인 출신으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비서실장’으로 잘 알려진 103세의 구익균옹이다.
‘도산의 비서실장’으로 유명
LA서 20년간 흥사단 활동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전인 1908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구옹은 1928년 신의주고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풀려났으며 1929년 중국 상하이에 망명했다.
망명 후 그는 중국 공학대학부에 다니며 상해 한국유학생회 간부로 활동하다 흥사단에 가입하면서 도산을 만났다. 그때부터 1932년까지 3년 간 도산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는 물론 신사상에도 해박했던 그를 도산이 ‘특채’한 셈이다.
“당시 도산은 중국 항일단체들과 은밀히 접촉하며 공동 투쟁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데 내가 연락책을 맡았어요. 항상 도산과 같이 다니다 보니 사람들이 비서라 부르곤 했지요.”
1930년에는 도산의 지시로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대독립당 결성 준비에 참여했고 1933년부터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그러다가 1935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붙잡혀 신의주로 압송돼 옥고를 치렀다. 이같은 업적을 인정받아 지난 1990년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3년 동안 도산을 그림자처럼 모신 그는 도산이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훌륭한 분’으로 기억했다. 이념에 따라 사람을 나누지도 않았고 사람들은 각기 장점이 있어서 쓰일 데가 있다는 게 도산의 신념이었다. 그도 도산의 가르침 가운데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뜻에 따라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자신한다.
해방 후 ‘민주 사회주의’와 한반도 영세 중립국화를 주장하며 정치에 투신하기도 했던 구옹은 미국에서도 20년 가까이 생활했다. 주로 LA에 거주하며 흥사단 활동에도 참여했다. 2001년 리버사이드에서 열린 도산 동상 제막식에는 90세가 넘는 노구를 이끌고 직접 참석해 감격어린 눈으로 지켜보기도 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가족들이 있는 한국으로 귀국한 구옹은 현재 서울 종로구 낙원동 낙원아파트에 방 한칸을 세내어 살고 있다. 정부로부터 매달 220만원씩 지원받는데 월세 50만원과 간병비 100만원을 제하고 나머지로 생활하고 있다.
<정대용 기자>
LA 한인 출신의 구익균옹은 올해 103세로 최고령 독립유공자다. 2001년 LA 거주 당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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