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모태범(21)이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금메달을 따내면서 한국 스피드스케이팅도 74년 묵은 숙원을 풀었다.
남자 숏트랙 대표팀이 처음 정식종목으로 발을 딛은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따내며 대표적인 ‘효자 종목’으로 떠오르기 전까지 한국 동계스포츠를 이끈 것은 스피드스케이팅이었다.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은 1936 독일 칼밋슈에서 열린 제4회 동계올림픽에서 일본 메이지대 학생이었던 김정연이 10,000m에 출전하면서 동계올림픽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김정연은 18분2초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12위를 기록해 당시 동양인으로서는 가장 좋은 성적을 내 희망을 던졌다.
그러나 해방 이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정식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정식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한 뒤로는 오랜 기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은 1948년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제5회 대회부터 1952년 제6회 대회를 제외하고 매번 동계올림픽 무대를 두드렸지만 대부분 20위권 진입도 버거웠다.
암중모색 끝에 다시 희망의 빛을 보기까지 40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했다. 1988년 제15회 캘거리 동계올림픽 남자 500m에 출전한 배기태는 36초90의 기록으로 5위에 올라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배기태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차례나 500m 우승을 차지하고 1990년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에서는 종합챔피언에 오르는 등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선구자 역할을 했다.
배기태의 뒤를 이어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간판으로 자리매김한 김윤만은 1992년 알베르빌 대회 남자 1,000m에서 1분14초86으로 은메달을 따내며 한국에 동계올림픽 사상 첫 메달을 안겼다.
하지만 여전히 동계올림픽 금메달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이후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까지 숏트랙이 대회 때마다 금메달을 쓸어 담으며 메달밭으로 자리매김한 사이 스피드스케이팅은 단 1개의 메달도 따내지 못했다.
묵묵히 실력을 갈고 닦으며 기회를 노리던 젊은 선수들은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부터 다시 도전에 나섰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이규혁(31)이 남자 1,000m에서 4위에 오르고 이강석(21)이 남자 500m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여자 500m에 출전한 이상화(20)도 77초04로 5위에 올라 아쉽게 메달을 놓치는 등 좋은 성적을 냈다.
세계 정상급의 전력을 갖추고도 금메달 문턱에서 주저앉아 아쉬움을 남겼던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대표팀은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더는 좌절은 없다”며 전의를 불태웠다.
밴쿠버에서도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은 첫 금메달을 따내기 위해 마지막까지 가슴을 졸여야 했다. 월드컵 랭킹 1, 2위를 지키던 이강석과 이규혁이 실전에서 부진해 각각 4위와 15위에 그친 것이다.
그러나 쟁쟁한 선배들 뒤에서 조용히 스케이트날을 갈던 막내 스프린터 모태범이 결국 일을 냈다. 모태범이 1, 2차 합계 69초82를 뛰어 1위에 오르면서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은 꿈에 그리던 올림픽 금메달을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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