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서구의 열강이 약소민족을 정복하면서 내세운 논리가 있다. 서구를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은 야만 국가이기 때문에 침략을 당하더라도 개화된 문명 세계로 나가게 해준데 대해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문화적 제국주의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일부 진보적인 학자 사이에 문화적 상대주의라는 주장이 일기 시작했다. 인류의 문화는 지역적 민족적 특성이 있으므로 특정 집단의 가치를 영구보편의 진리로 볼 수 없으며 우월성도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다.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저항 세력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공로가 있는 주장이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제3자가 봐도 잘못된 관습인 경우 이를 민족 고유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변호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중국의 전족이다. 여성의 발을 묶어 사실상 병신을 만드는 이 관습은 오래 전부터 선각자들 사이에서 비판의 대상이 돼 왔으며 중화 인민 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폐지됐다.
이보다 끔찍한 것은 인도의 수티라는 제도다. 인도 일부 지역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미망인이 남편의 시체를 태우는 장작더미에 뛰어들어 같이 죽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자발적으로 뛰어드는 것도 말려야 할 판에 그러지 않는 미망인은 강제로 불덩이에 던져졌다. 이 또한 인도 독립 후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폐지됐다.
상대주의의 논리에 충실하다 보면 전족도 수티도, 아직까지 아프리카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는 여성 성기 절제도, 심지어는 식인종들의 문화까지 그대로 수용돼야 한다. 그러나 이는 인류 보편의 가치인 인간 생명의 소중함과 인권의 이름으로 금지돼야 마땅하다.
한 동안 친북학자 사이에 ‘내재적 접근론’이란 설이 유행했었다. 북한 체제 문제는 북한의 역사와 사회 특유의 것으로 북한 내부의 관점에서 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강제 수용소와 인권 침해는 모두 내부 고유 사정에 의한 것으로 외부에서 비판할 여지가 없게 된다. 송두율 교수에 의해 제창된 이 이론은 뒤에 강정구, 이종석 등에 의해 발전돼 친북 좌파의 기본 강령이 된다.
그러나 송 교수보다 일찍이 ‘내재적 접근법’을 주장한 인물이 있다. 바로 박정희다. 그는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면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한국 고유의 현실을 감안할 때 서구 민주주의와는 다른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며 유신 독재를 이렇게 부른 것이다.
이런 그의 주장에 민주 투사들은 강력히 반발했다. 김대중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두 사람은 이상하게도 북한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바위 같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DJ는 죽기 직전까지 이명박 독재를 비판하면서도 김정일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이명박이 독재 정부라면 김정일은 무엇일까. 설마 민주정부는 아닐 것이다. 더 신기한 것은 이같은 두 사람의 이율배반적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는 한국인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이율배반을 일삼는 것은 좌파만이 아니다. 몇 년 전 미군이 아부 그라이브에서 이라크인의 인권을 마구 침해했을 때 부시를 지지하며 북한 인권을 외치던 사람들은 굳은 침묵을 지켰다. 남한 사람의 인권이 중요하면 북한 사람의 인권도 중요하고 북한 사람의 인권이 소중하면 이라크인의 인권도 소중하다. 인권 유린의 책임자라면 김정일든 부시든 똑같이 지탄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인간은 자기편 잘못에 관대하고 남의 편 잘못에는 가혹하다. 그래서 사회에는 좌와 우가 모두 필요한지 모른다. 스스로는 자기 잘못을 고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기울지 않고 공평하게 사물의 잘잘못을 가려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성인뿐인가 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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