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 27명 가운데 장자가 왕위를 물려받은 경우는 단 7번에 불과하다. 왕조시대에는 장자 계승이 불문율이었음에도 현실은 달랐다. 자신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후계자로 세웠던 조선조 3대 왕 태종이 대표적이다.
태종의 자리를 물려받도록 돼 있던 원래 세자는 양녕이었다. 하지만 정작 왕이 된 것은 그의 동생 충녕이었다. 야사에는 그가 자신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진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 일부러 미친 척하며 일탈행동을 일삼았다는 얘기가 전해지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양녕은 왕이 되고 싶어 했으며 원대한 포부도 있었다.
조선실록을 보면 양녕이 동생 충녕에 대해 험담하는 내용이 나온다. 또 나중에 세종이 되는 충녕의 장인인 심온이 양녕의 비리에 대해 소문을 내는 모습도 있다.
양녕의 약점은 너무 일찍 후계자로 노출됐다는 점이었다. 자연스럽게 차기 지존에 줄을 대려는 무리들의 공략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올바로 수신하고 평상심을 잃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태종의 계산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양녕은 아버지의 기질을 가장 많이 닮은 왕자였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셋째를 후계자로 바꾼 것은 자신이 넘길 유산을 가장 성실하게 다질 자질이 있는 아들은 셋째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세습에 대한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자신의 아들 김정일에게 권력을 넘긴데도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김일성 연구 전문가인 서대숙 박사는 “김일성은 빨지산 항일운동 시절부터 북한을 다스린 50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배신과 반항을 겪으며 이 문제를 심사숙고하게 됐으며 오랜 시일을 두고 후계 작업을 진행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생전에 스탈린 격하 운동 등 수많은 지도자들의 비참한 종말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사후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받은 김정일이 자신의 셋째 아들인 20대 중반의 김정운을 후계자로 선정했다는 정보 당국의 분석과 보도들이 쏟아지고 있다. 김정일의 계산도 아버지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김정일의 권력 승계와 김정운의 3대 승계 작업에는 차이가 있다. 김정일은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후계자로 부상했다. 그가 김일성의 후계자로 낙점된 것은 1974년 2월이었지만 표면으로 부상한 것은 1980년이 지나서였다. 그때까지는 ‘당중앙’이라는 불분명한 호칭으로 언급됐다. 부자 승계에 대한 여론도 떠보고 기반을 다지는 충분한 기간을 가진 것이다.
그에 비해 이번 김정운의 승계 작업은 조급하고 취약해 보인다. 금년 67세인 김정일은 건강이 이 좋은 못하다. 아무리 김정일의 의중이 중요하다 해도 김정운이 권력기반을 다지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태종은 셋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후 4년 동안 아들의 통치에 간섭하고 훈수를 두면서 강력한 왕권을 다지는 일을 도왔다. 이 기간이 있었기에 세종시대가 가능했다.
유례없는 3대 권력세습에 북한의 최고 동맹인 중국조차 불편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게다가 현재 김정일의 건강상태로 볼 때 자기 아들이 권력기반을 충분히 다질 때까지 생존해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승계를 서두르고 있는 것 자체가 이것을 말해준다. 시간과 역사는 김정일 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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