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 전화선을 통해 들려오던 박 선생의 격하고 거친 말씀을 뒤로 하고 수화기를 놓은 뒤 적잖게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박 선생께서 토해 놓았던 그 한 마디가 머리를 떠나지 않아 몇 날을 가슴앓이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시를 낭송했다는 이유로 또는 시집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박 선생께서 그날 아침 그토록 진저리 치셨던 그 ‘빨갱이’로 몰려 처벌을 받아야 했던 그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군사 독재가 서슬 퍼렇던 1982년 군산의 한 고등학교 교사들이 시집 한권 때문에 간첩으로 몰렸던 ‘오송회’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오송회 사건은 당시 교사들이 돌려 읽었다는 오장환 시인의 시 때문이었습니다.
일제 말기의 조선 문단에서 ‘시의 왕’으로 불렸던 오장환 시인의 시가 왜 ‘빨갱이’를 입증하는 증거가 됐느냐구요?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오장환 시인이 해방 직후 북으로 넘어간 월북시인이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공안 조작사건이 지난 5월초에 26년만에야 법원의 재심 결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박 선생님, 26년 전의 그 ‘병든 서울’에서는 시가 문제였지만 2008년의 ‘병들어가는 서울’은 ‘촛불’이 문제라고 하네요. 밤 8시가 넘은 시간에 ‘촛불’을 들고 서울 거리에 서 있다면 십중팔구 선생님의 그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이라는 것이지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좌빨’들의 선동을 받지 않았다면 그 시간, 그 곳에서 ‘촛불’을 켤 리가 없다는 것이 ‘촛불’을 증거로 내세우는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좌빨’이라는 말이 생소하시다구요. 박 선생께서 목소리 높이셨던 ‘빨갱이’라는 말은 한물 지난 구닥다리 낙인이 됐고 요즘은 ‘좌파 빨갱이’를 줄인 ‘좌빨’이라는 신종 낙인이 더 많이 쓰인다고 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박 선생님, 그날 아침 제가 선생으로부터 ‘반미’니 ‘빨갱이’ 따위의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들어야 했던 것은 미국 이민구치소의 열악한 의료환경 때문에 많은 이민수감자들이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는 짤막한 기사 하나가 이유였습니다. 미국 사회의 잘못된 제도와 관행을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선생에게는 ‘반미’나 ‘빨갱이’의 문제로 환치되었는지 아직 전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민자인 우리들이 이 땅의 주민으로 뿌리내리며 살아간다면 건전한 비판과 정당한 권리 요구는 당연한 우리의 몫입니다. 이민자가 주인 눈치 보는 손님처럼 살아갈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깊은 애정과 관심이 없다면 건전한 비판도, 정당한 권리 찾기도 할 수 없는 거지요.
1세 이민자이신 선생께서 이 미국 땅에서 아시아인이라고 차별 받지 않고 사회복지 연금을 받으시며 어깨 펴고 살아가시고 있는 것은 선생께서 분명 ‘반미’니 ‘빨갱이’라고 매도하셨을 많은 민권 운동가, 소수인종, 건강한 미국시민들이 힘을 모아 흘린 피땀의 역사 때문이라는 점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김상목
사회부 부장대우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