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왕이 어느 날 나라의 모든 어린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곤 아이들에게 작은 씨앗을 한 개씩 나눠주었다. 한 달 후 그 씨앗을 심어 잘 키워낸 아이들에게 상을 주겠노라고 했다.
한 달이 지났다. 모두들 예쁜 꽃이 핀 화분을 하나씩 들고 나타났다. 그 중에 한 아이만 풀이 죽은 얼굴로 흙만 들어 있는 화분을 가져왔다. 한 명씩 왕 앞에 나가 어떻게 씨앗을 심고 키웠는지 말했다.
아무 것도 피지 않은 화분을 든 아이 차례가 되었다.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한 달 동안 물을 열심히 주고 정성껏 돌봤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왕은 모든 아이들을 돌아보며 ‘이 아이가 정직한 아이’라고 말했다. 왕이 나눠준 것은 썩은 씨앗으로 아무 것도 피지 않는 것이 맞는데, 모두들 결과물을 보여주려고 다른 씨앗을 심어 가져온 것이었다. 곧이곧대로 썩은 씨앗을 심고 기다린 아이가 결국 왕의 칭찬을 받게 된다.
오래 전 여섯살 때 쯤 동네 교회에서 들었던 이야기이다. 워낙 강렬한 인상을 받은 이야기여서 아직도 가끔 떠올리곤 한다.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씨앗을 뿌리는지, 썩은 씨앗을 뿌리고 멋있는 결과물을 거두어내려고 바둥대는 것은 아닌지, 때때로 생각하게 한다.
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자는 하루 평균 7,000개의 단어를 말하고 여자는 평균 2만개의 단어를 말한다고 한다. 여자가 남자의 3배에 달하는 말을 하는 것도 놀랍지만, 남자건 여자건 한 달에 한 권씩의 책을 낼만한 양의 말을 쏟아낸다는 사실이 더욱 새롭다.
문제는 이런 말들이 입 밖으로 나와 세상에 뿌려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씨앗들인지, 아니면 그냥 죽은 씨앗들인지, 그래서 말해 봤자 아무 효과도 영향도 없는 것들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데 있다. 오늘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이 모여 책 한권으로 엮여 나온다고 상상해 보자. 차라리 아무 말 하지 말걸… 하는 후회가 들지 않는가.
광고를 만들다 보면 말, 그것도 짧은 시간에 어떤 말을 할지를 두고 고심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15초 광고가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되도록 말을 줄이고 보여주는 것으로 연구했었다. 다행히 환경이 좀 나은 미국에서는 30초 광고를 하게 되고 60초 라디오 광고를 만들게 되니, 이제는 더 말을 늘려야 하는 고민이 생긴다.
사실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짧고 간단한 한마디 정도인데, 지루하지 않게 말해야 하고 다 듣고 나서도 요점이 남아야하니 만만치가 않다. 인쇄광고를 만들 때에는 헤드라인 때문에 시간을 오래 보낸다. 짧은 한 줄에 거의 모든 걸 담아야 하니 한 글자 한 글자가 보통 고민되는 일이 아니다. 결국 한 문장을 건지기 위해 수백, 수천 개의 문장을 쓰고 지우고 버리게 된다. 버려야 할 말들, 쓸모없는 말들은 걸러내고 나면 알맹이만 남는 말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매일 몇 만 단어를 말해 놓고도 잠자리에 누워보면 건질 말이 없는 하루. 뒤돌아보면 후회스러운 말들. 주워 담을 수 없는 죽은 말의 씨앗들, 싹 하나 나지 않을 씨앗들이 매일매일 뿌려지고 있는 것이다.
말을 배우는 데는 3년이 걸리고 침묵을 배우는 데는 60년이 걸린다고 했다. 승자는 남의 말을 듣고, 이해하고 반응하지만, 패자는 자신의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린다고 했다. 귀가 두 개, 입이 한 개인 것도 말하기보다 잘 듣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올해 벌써 두 달이 지나간다. 뿌려놓은 말의 씨앗들이 봄이 되어 싹이 나기 시작할 시기다. 연말에 어떤 열매들이 나를 맞을지… 아직 늦지 않았다면, 지금부터라도 죽은 씨앗들을 뿌리지 않도록 힘써야겠다.
유정민
텐 커뮤니케이션스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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