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만주에서 시작된 거국적 독립운동이었습니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재만(만주지역)무장단체 통일기관 ‘대한광복군’ 창설의 주역인 동우 이탁(李鐸)열사의 외손자인 김문조 옹은 “이탁, 이동휘, 안태국 등 재만독립운동가들은 1918년 4차례 모임을 갖고 고종황제의 국장일(1919년 3월3일)을 계기로 거국적 독립운동을 전개시키기로 결정, 3.1운동을 준비했다”며 “특히 이탁 열사는 1918년 중국 관동 군관학교를 수료하고 만주 봉천에 돌아온 친동생 서우 이석 열사를 3.1운동 거사를 위해 국내에 잠입시켰다”고 주장했다.
김 옹은 이어 “3.1 운동의 발단에 대해 33인의 한 사람인 신석구 목사는 ‘그것(3.1운동)은 만주에서 처음 시초가 되었다’고 증언했다”며 “서우 이석을 비롯, 27명의 결사대는 고종황제 국장일 즈음, 이완용과 주병준, 이근택, 조중응, 이지용, 윤덕용, 이병무 등 세칭 을사5적과 7적
을 암살할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했으나 거사에는 실패했다”고 밝혔다. 이탁 열사는 이 사건으로 궐석재판을 받아 징역 12년 형을 선고 받았으며 8년 형을 선고 받은 주병웅 열사는 4년 만에 옥사했다.
한편 김 옹은 “서울 특파 결사대에 참가했다가 체포, 이후 변절한 것으로 알려진 이탁(李?)은 이탁(李鐸)열사와 동명이인이다. 당시 이탁 열사는 대한광복군 사령부장 대리로 각 지역의 무장투쟁을 상해에서 진두지휘하고 있었다”며 “이 같은 오해로 이탁 열사에 대한 잘못된 사료가 많다”고 밝혔다.
김 옹은 이어 “이탁 열사는 1930년 ‘상해 동포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만큼 동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국립묘지에 이탁, 이석의 묘가 마련돼 있지만 이탁 열사의 유해는 상해에 이석 열사의 유해는 아직 북한에 있다. 두 분의 유해가 온전히 대한민국에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후손된 도리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 발만 구르고 있다”며 “1919년 일어난 3.1운동과 1920년 창설된 대한광복군의 애국애족의 정신이 미주한인사회와 대한민국에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진수 기자>jinsu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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