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점 많은 한 인간이 역사 흐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
“하나님은 기이한 방법으로 역사한다.” 기독교인들이 흔히 하는 주장이지만 찰리 윌슨과 소련 제국의 멸망을 보면 그 말이 진리인 것 같다. 윌슨은 보수적인 텍사스 지역 출신이지만 리버럴한 바람둥이 연방 하원의원이었다. 그런 그가 소련 해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리라고는 하나님 말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의 스토리를 정리해 본다.
1988년 소련의 아프간 철군은 공산주의 불패 신화에 종지부를 찍었고 소련 경제의 파탄과 함께 공산주의 몰락의 전조였다. 이는 곧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1992년 소련 해체로 이어지며 공산주의가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된다.
소련이 아프간에서 패배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찰리 윌슨이다. 해군 사관학교 출신으로 보수적인 텍사스 동부 러프킨 지역을 대표하는 민주당 연방 하원의원이 된 윌슨은 술과 여자를 좋아하며 마약을 복용한 적이 있으며 사고를 낸 후 뺑소니 운전을 하고 도망쳤다가 적발된 적도 있는 방탕아다.
이 때문에 1983년 당시 연방 검사이던 루돌프 줄리아니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되지는 않았다. ‘놀기 좋아하는 찰리’(Good Time Charlie)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의원사무실 직원을 모두 ‘찰리의 천사’(Charlie’s Angels)로 불리는 미모의 여성만으로 채용한 것도 유명하다.
지역 유권자들은 그가 이런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1973년부터 1996년 그가 은퇴할 때까지 그를 계속 하원에 보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주민들의 민원을 누구보다 잘 해결했다. 또 낙태, 여권, 인종 문제에대해서는 리버럴한 입장을 보였지만 주민들이 신봉하고 있는 총기 소유권, 반공산주의 등에는 강력하게 동조했다.
인기 있는 지역 정치인으로 일생을 보낼 뻔한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1980년 여름 라스베가스 호텔에서 한 뉴스 프로를 보면서였다. 플레이보이 모델과 욕조에서 와인을 마시며 TV를 보던 그는 아프간 주민들이 첨단 무기로 무장한 소련군에 맨몸으로 저항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없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속해 있던 국방 예산 소위원회 표결을 통해 아프간 반군 지원 예산을 2배로 늘렸다. 10여 차례 파키스탄의 아프간 난민 수용소를 방문하고 지아 울 하크 파키스탄 대통령을 만난 후 그는 아프간 전사들의 용기에 더욱 감명 받았으며 이들에 대한 군사 지원금을 대대적으로 늘린다. 그전까지 구식소총밖에 없던 이들은 비행기와 헬기를 격추시킬 수 있는 스팅어 미사일과 대전차포로 무장하고 소련군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결국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감당하지 못한 소련을 평화 협상을 제의하며 1988년 이를 체결하고 다음 해에는 모두 물러갔다. 소련 철군 후 “어떻게 아프간 전을 승리로 이끌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지아 울 하크 대통령은 “찰리가 했다”고 답했다.
그러나 소련의 패퇴 이후 미국의 아프간에 대한 관심은 급속히 식기 시작했다. 윌슨은 도서관 등 아프간 재건을 위한 기금 증액을 요구했지만 이는 동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프간에 관심 있는 미국 유권자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 그들의 반응이었다. 결국 아프간의 모두의 무관심 속에 내전 상태로 빠져들었고 알 카에다와 탈레반에 의해 장악됐으며 그것이 어떻게 9/11 사태로 이어지게 되는지는 다 아는 이야기다.
윌슨은 최근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당시 ‘악의 제국’과 싸우고 있었다”며 “그 때 아프간 반군을 돕지 않는 것은 제2차 대전 때 히틀러와 싸우고 있던 소련을 돕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반군 지원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소련을 내몬 후 뒷마무리를 잘못했다는 것이다.
1996년 은퇴한 후 로비스트로 활동했던 그는 심장 질환 등 건강이 나빠지면서 고향 텍사스 러프킨으로 돌아갔다. 한 때 생명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기도 했지만 지난 9월 심장 이식 수술을 받은 후에는 건강을 되찾았으며 지난 달 LA에서 열린 영화 ‘찰리 윌슨의 전쟁’ 개막식에 특별 초대돼 탐 행크스 주연의 영화를 감상하기도 했다.
윌슨의 삶은 결점이 많은 한 사람의 용기 있는 행동이 역사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수도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소설보다 극적인 넌픽션
윌슨의 활약을 일반에 널리 알린 사람은 CBS TV 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조지 크릴이다. 그가 쓴 ‘찰리 윌슨의 전쟁’(Charlie Wilson’s War)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 기세를 떨치던 소련이 어떻게 9년 만에 꼬리를 내리고 철군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은 최근 영화로 만들어져 비평가들의 찬사 속에 지난 달 개봉됐다.
크릴은 31살에 CBS에 들어가 30년 동안 활동한 베테랑 방송인이다. 1976년 CIA의 반 카스트로 공작을 심도 있게 다룬 ‘CIA의 비밀 군대’로 두각을 나타낸 그는 남아공, 베트남 등 역사적 분쟁 지역에 뛰어들어 뛰어난 다큐멘터리를 제작, 피바디, 외신 기자클럽이 주는 에드 머로우 상 등 주요 상을 수상했다. 역사가 헨리 커미저는 “그가 만든 ‘CIA의 비밀 군대’는 미 역사상 가장 중요한 보도의 하나”라고 격찬한 바 있다. 2003년 ‘찰리 윌슨의 전쟁’을 쓰며 스타덤에 오른 그는 불과 2년 뒤 한참 일할 나이인 61세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