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분하던 미국 대통령 선거가 요즘 재밌어졌다. 굳이 투표할 것도 없이 일찌감치 힐러리-줄리아니 대세론으로 굳혀지는 듯 싶더니 마이크 허커비라는 이름조차 생소한 전 아칸소 주지사가 갑자기 나타나 판세를 뒤흔들고 있다.
정책 참모가 고작 3명에 불과해 25세 딸이 전국 캠페인 디렉터를 맡은 무명 후보가 선거자금과 조직력이 10, 20배를 넘는 라이벌들을 제쳤으니 그야말로 다윗 대 골리앗이다. 불과 수개월전 지지율이 3%에 맴돌던 허커비의 신들린 부상은 돈과 권력이 모든 것은 아니라는 신선한 교훈을 주고 있는데 선거자금 개혁을 몇번이고 추진해온 것도 이런 맛을 좀 보려고 한 것이 아닌가.
허커비는 과연 어떤 인물이길래 그럴까? 우선 허커비는 강간과 근친상간의 경우에도 낙태를 연방정부가 금지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는 그는 에이즈가 전염성이 낮은 질병으로 확인된 지 오래인 1992년에도 에이즈 환자들을 일반인들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커비는 또 1998년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 복종하듯이 남편의 리더십에 복종해야 한다”는 남부침례교 교리를 지지한다는 광고를 USA투데이에 실었다.
허커비의 최대 국내정책 제안은 연방소득세를 폐지하고 판매세로 대체한다는 것. 지출이 전체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저소득층이 부유층보다 많기 때문에 같은 세금을 내더라도 저소득층에 부유층보다 더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셈인데 구약시대의 십일조도 이보다는 더 진보적인 세금제도였다.
해외정책은 어떠한가. 허커비에 따르면, 차기 미국 대통령은 과격 이슬람과의 세계적인 투쟁에서 서양 문명을 이끌 사람이다. 중동에 관해서는 유태인들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준 땅을 되찾을 권리가 있으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땅이 주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지자들은 또 침례교 목사인 허커비의 도덕성을 높이 사지만 그는 주지사 시절 한해 동안에만 선물로 받은 것이 11만달러 상당이었다. 결혼한 지 30년이 지났는데도 결혼선물은 제한에서 면제되기 때문에 기부자들이 선물을 줄 수 있도록 결혼선물 레지스트리를 열었다.
돈도 이름도 없이 선두권에 올라선 허커비의 인기는 한마디로 기독교 보수주의 세력의 맹목적인 지지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미국의 선거인단제도로 ‘바이블 벨트’에 밀집한 근본주의 세력은 실제 인구비율에 비해 엄청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데 이같은 한 특수 그룹의 정치력은 이번 허커비 부상으로 나타난 미국 정치의 어두운 면이 아닐까. 낙태권 박탈과 동성애자 배척을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위급한 이슈로 여긴다면 이는 특수 그룹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경험이 부족하고 과학을 경멸하지만 남부 근본주의 세력에 힘입어 대통령이 된 인물은 이미 지금 백악관 집무실에 앉아있다. 과연 미국은 조지 W. 부시 시대의 연장을 원하는 걸까?
우정아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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