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은 민족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선각자다. 1902년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온 도산 선생은 미주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이끌다 1932년 중국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됐고 해방되기 7년 전 투옥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큰 딸 안수산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한일합방 전 청년 도산은 이토 히로부미를 만났을때 독립 운동을 하지 않는 대신 조선의 대통령직을 제안 받은 적이 있는데 이를 거부했다. 지금 살펴봐도 도산이 당시 주장하던 민족자주, 남녀평등의 이론은 시대를 앞서가는 구국정신의 발로였다고 아니할 수 없다.
민영휘(1852~1935)는 대표적인 친일파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해 말 민영휘를 ‘한일합방의 공으로 자작을 받은 자로서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하는 자’로 규정했다.
한국산업기술대 서영희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민영휘는 임오군란(1882년)때는 군인들에 의해 탐관오리로 지목됐으며 갑오농민전쟁(1895) 때는 청군을 끌어들이는데 앞장섰다. 그가 출세하게 된 계기는 명성황후가 일본 부랑자에 의해 시해되던 을미사변(1894년) 때다. 명성황후의 사촌동생인 그는 명성황후의 비밀장부를 관리하다 황후가 죽자 그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고 한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그가 죽은 뒤 아들 대식은 1937년 일제에 군용기를 헌납했고 해방 후에는 한국은행 초대총재를 지냈으며 조흥은행을 설립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막내 규식은 중추원 참의를 지내며 조선의 남녀 청년들을 태평양 전쟁에서 총알받이와 정신대 요원으로 동원하는데 앞장섰다.
이밖에도 민영휘의 후손은 명문 사학 휘문중고를 소유하고 있으며 남이섬을 사들여 관광지로 개발했다. 당시 상황이 일본의 억압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민족의 우민을 깨우쳐야 하는 위정자들의 입장이었으니 한치도 지나지 않은 역사의 잣대로 재어보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하지만 친일을 친일이요, 매국은 매국이라는 것이 요즘의 정서인 것만은 분명하다.
지난 16일 LA한인회관에서는 애국선열 추모행사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안수산 여사가 참석해 안창호 선생의 독립운동 얼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민씨 집안의 후손들도 참석했다. 이들 역시 일제의 통치 기간 암울한 시대를 살아오며 한국 독립과 자주를 부르짖으며 홀연히 이국땅에서 소멸되어간 미국 초기 이민 선조들의 넋을 기렸다.
이를 지켜보는 기자는 문득 역사의 아니러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옛 안창호의 후예와 민영휘의 후예의 자연수런 조우이니 말이다. 민족의 화해였던가.
한가지 덧붙이자. 이날 행사에서는 안수산 여사가 계속 ‘수잔 안’이라고 호칭으로 불렸다. 행사 주체로 사회를 보았던 모 인사조차도 그를 ‘수잔’이라 불러댔다. 정확히 말한다면 ‘수잔’은 ‘수산’의 잘못이다. 독립투사 후손의 이름조차 모르고 연거푸 실수를 반복하는 행위를 무지라고 보아야 하나 무관심이라고 보아야 하나 해답 찾기가 어려워 답답했다.
정대용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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