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프린스 1호점>과 한국 미디어 속의 동성애
3. 유사 동성애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극 중 남자 주인공 한결은 남장 여인 은찬을 남자인줄 알고 사랑한다. 그러면, 한결은 당연히 게이인 것이고, 이 드라마는 동성애 드라마가 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진정 <커피 프린스 1호점>은 동성애 드라마인가?
은찬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사실은, 이 프로그램을 시청했던 30%의 한국인, 그러니까 열명 중 세명의 한국인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비밀 아닌 비밀을 모르는 사람은 오직 한결, 한 사람 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커피 프린스 1호점>이 동성애 드라마가 될 수 옶도록 하는 부분이자, 프라임 타임에 방영될 수 있었던 데 대한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말했듯이, <커피 프린스 1호점>은 동성애 드라마가 결코 아니다. 약간은 억지 스러운 시작이었음에도, 은찬이 왜, 꼭, 남장 여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가에 대한 비밀이라든가, 은찬의 생물학적 성별조차 극을 시청한 30%의 한국인에게는 결코 비밀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짜고 치는 고스톱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남자 주인공 한결만 속된 말로 병신 만드는, 뼛속까지 이성애 드라마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결의 얼토당토 않은 커밍 아웃 해프닝이라든가, 대중 앞에서 벌린 남장 여인 은찬과의 키스 씬조차 진지함이 쏙 빠진 코메디가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의 키쓰 씬 속에서 동성애 코드가 끼어들 틈이란, 은찬에 대한 대국민적 정보의 공유를 통해 이미 철저히 차단되어 있다. 우리는 그저, 이 우스운 사랑 놀음의 해피엔딩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커피 프린스 1호점> 속에는, 한결과 은찬의 사랑놀음 속에는 우리의 상식과 고정관념을 건드리는 그 어떠한 거북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고 묻는가. 왜냐하면 말이다, 우리는 이미 <커피 프린스 1 호점>이 동성애 드라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찬은, 비동성애자와의 불가능한 사랑을 쫓는 가난하고 불쌍한 동성애자가 결토 아니다. 그/그녀는 우리의 저 사춘기적 <올훼스의 창>과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또다른 유리우스와 오스칼이다. 그녀/그의 짧은 커트 머리와 소탈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그/그녀는 모든 남성들의 판타지임에 틀림없다.
은찬은 이 시대의 고뇌하는 동성애자의 검은 그림자를 결코 끌고 다녀 본 적이 없으므로, 그/그녀는 캔디이자 유리우스이자 오스칼처럼 항상 빛난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일이란, 그저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로 화하듯 우리의 은찬이 여자임을 밝힐 그 순간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윤은혜의 새로운 헤어 스타일을, 그리고 보이쉬한 패션을 흉내내는 것 뿐이다.
4. 다시 사유의 재발견에 대해
내가, 이 한 편의 드라마를 통해 우리 사회의 동성애에 대한 가치관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일까?
그리고, 우리는 과연,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각종의 집단과 문화적 코드에 대해 알튀세 류의 ‘사유의 극단적 밀어부치기’를 통해 이해의 단초를 쌓아가려 노력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너무 아픈 질문이 될까?
한국의 미디어 산업은 동성애에 대한 진지한 고민조차 해 본적이 전무한 상태에서 그저 상업적 이용을 위해 동성애에 대한 왜곡된 패로디를 이미 시작하고 말았다.
우리는 전통적 성 윤리관이 지배적 대세인 사회 속에서 느길 수밖에 없는 동성애자들의 고뇌와 싸움과 눈물을 보기 전에 판타지를 이미 보아 버렸다. 그것도 가짜 동성애 드라마를 통해서 말이다.
’우리’와 ‘우리와 다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이며, 또한 자의적인 이데올로기의 결과물이 아닌가. 이 ‘우리와 다름’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경멸감과 두려움과 이질감이 몰이해와 테러를 낳을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모든 정체성이 그러하듯, 성적 정체성 또한 상상의 산물임을, 주체는 분열되어 있으며 타자(他者)와의 끊임없는 모방을 통해 형성됨을, 호미 바바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잘 안다.
미디어를 통해 트랜스젠더 하리수를 대하며, 우리는 모든 트랜스젠더가 그녀처럼 아름답고 명랑해야 된다고 쉽게 생각한다. 우리에게 성적 정체성의 불일치로 인해 오랜 세월 겪어왔을 그녀의 눈물과 투쟁은 결코 보고싶지 않은 대목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상품이 되지 못한 채 언제나 그늘 기억의 어두운 저장고 속에 팽개쳐져 있는 쓰레기 더미에 불과하다.
알다시피, 세상의 모든 서사구조며 예술적 재현물들이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라 했을 때, 우리는 <로드무비>같은 영화를 통해 세상과의 소통을 향한 외롭지만 아름다운 인간들의 노력들을 본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기에 흥행률이 엉망이었던 영화.
그저 영화라고, 팔짱을 낀 채 바라보고 있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이 한 편의 영화 속에는,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는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무게감과 동성애자의 존재론적 비장함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동성애에 대한, 그리고 동성애자들에 대한 진지한 사유, 더욱 확장된 사유의 지평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 지긋지긋한 삶의 무게를 무의미한 농담과 아주 가벼운 상상력으로 바꾸어 보는 것도 한 편으로는 재미있을지 모르겠다. 드러나, 생각해 보라, 삶이 어찌 그리 녹록키만 하겠는가.
<커피 프린스 1호점>이 아주 가벼운 상상력으로 일상의 가벼움을 건져내기 위해 현실감각을 포기하고 만화적 트랜드를 선택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골치 아픈 현실에 대해 아주 ‘극단적’으로 사유하기 보다 만화보다 가벼운 상상력으로 현실을 뒤틀어 버리는 편을 선택할 수 도 있다.
그럼에도 말이다, 우리는 인간이 아닌가. 약간은 ‘바른 생활 맨’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입만 열면 읊어대던 그 ‘열린 사회’의 ‘열린 인간’이 되자면, 알튀세 식의 ‘사유의 극단’을 통해 확장된 사유의 장으로 나아가는 일이 첫번째 실천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영화 기자> drclara@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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