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는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여황제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다. 당나라 고종의 후궁으로 들어와 황후를 몰아내고 황후가 된 후 고종이 죽자 ‘측천 금륜 대성신황제’란 어마어마한 이름을 지어 스스로 여황제라 칭했다.
‘사악하고 음탕한 여자’라는 평과 ‘명군’이라는 평을 동시에 받고 있는데 누명을 씌워 자기가 쫓아낸 황후를 곤장을 쳐 죽이고 정적은 물론 자신의 자식까지 마구 살해한 것을 보면 보통 인간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반면 일개 후궁의 신분에서 출발,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절대 권력을 차지했고 일단 권력을 잡은 후에는 적재적소에 인재를 기용해 ‘무주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이룩한 것을 보면 능력은 있었던 모양이다. ‘무주’는 측천무후가 바꾼 나라의 이름이다.
그러나 50여 년 간 권력의 정상에 있던 무후도 나이가 들자 병에 걸렸고 결국은 반대 세력에 의해 거세돼 권력을 잃었다. 705년 82세의 나이로 자신의 묘비에는 아무 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과 함께 쓸쓸히 숨을 거뒀다.
지금 중국에서는 서안 인근 양산에 위치해 있는 그녀의 무덤 발굴을 놓고 논란이 한창이라고 한다. 그녀의 능은 중국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도굴 당하지 않은 채 완벽하게 보존된 황릉으로 발굴되면 중국 역사 연구의 새 장을 열 수 있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현재 기술로 발굴하다가는 오히려 망칠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동양에 측천무후가 있다면 서양에는 하트셉수트가 있다. 이집트 18번째 왕조의 5번째 파라오인 그녀는 투트모스 2세의 부인으로 그가 죽자 파라오의 자리에 올랐다. 이집트 역사상 여성이 권력을 잡은 적은 4번 있었지만 나머지는 섭정이었을뿐 파라오의 직함을 단 것은 그녀가 유일무이하다.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의 국력이 정점에 있을 때 20여 년 간 집권한 그녀는 정복 전쟁을 통해 남쪽의 누비아, 북쪽으로 시리아까지 세력을 떨쳤으며 이집트 전역에 걸쳐 수백 개의 신전과 기념비를 세웠다. 어떤 남성 못지않게 잔혹하고 호전적인 두 여걸의 치세는 여성이 권력을 잡으면 보다 평화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잘못임을 보여준다.
측천무후의 시신이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트셉수트의 미라는 이미 100년 전 투탕카문의 묘를 발견한 하워드 카터에 의해 발굴됐다. 다만 그것이 진짜 그녀의 유해냐를 놓고 논란이 계속돼 왔으나 이제 그것도 종지부를 찍게 됐다. 26일 이집트 학자들이 그녀의 이름이 적힌 상자에 든 이빨이 그 미라의 입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것을 ‘투탕카문 이래 이집트 고고학의 최대 업적’이라 부르고 있지만 한 때 천하를 호령했던 하트셉수트의 말라빠진 유해는 권력과 세월의 무상함만 새삼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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