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 보면 기원전 5세기 경 페르샤의 관리였던 느헤미아가 왕에게 유다 지역에 여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부탁하는 구절이 나온다. 왕은 이를 승낙하고 그 지방 총독에게 그가 안전하게 그 일대를 돌아다닐 수 있도록 보살펴 주라는 편지를 써준다. 이것이 요즘 말하는 여권의 원조인 셈이다.
영어로 ‘패스포트’(passport)로 불리는 여권은 얼핏 보면 ‘항구 통행증’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port’는 항구가 아니라 ‘문’이란 뜻이다. 중세 때는 도시마다 성을 쌓고 성문을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었는데 그 문을 ‘port’라고 불렀다. 당시 여권에는 여행자가 지나갈 수 있는 도시의 리스트가 적혀 있었다. 이 시스템은 19세기중반까지 계속됐다.
이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것은 철도의 보급이다. 유럽에서 철도 여행이 인기를 끌면서 여행자 수가 급증하자 프랑스는 1861년 여권과 비자 제도를 철폐했다. 다른 나라들도 곧 뒤를 따랐고 1914년 제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 전역을 여행하는데 여권도 비자도 필요 없었다. 그러던 것이 전쟁이 터지면서 안보를 이유로 이것이 재도입 된 것이다.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유럽 통합의 기운이 무르익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1993년 유럽 연합(EU)이 탄생하면서 다시금 EU 가맹 국민은 여권이나 비자 없이 EU 전역을 여행하는 것이 다시 가능해졌다.
유럽과는 정반대로 최근까지 여권 없이 다니던 곳에 앞으로는 여권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지역이 있다. 바로 유리가 살고 있는 미국이다. 미 국무부는 9/11 사태의 여파로 올해 1월부터 멕시코나 캐나다, 버뮤다 등 커리비언 지역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여객선 및 항공 승객에게 여권 소지를 의무화했다. 그 전까지는 출생 증명서나 운전 면허증만 있으면 됐다.
이로 인해 2005년 1,200만 명에 불과하던 여권 신청자 수는 올해 1,75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된다. 예상외로 신청자가 급증하자 행정 당국은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으며 여권 발급 기간도 과거 6주에서 12주 이상으로 늘어났다.
일찍이 해외 여행 계획을 세워놓고 들떠 있던 미국인들은 여권이 나오지 않자 지역구 연방 의원들에게 호소하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내년 1월부터는 육로로 멕시코나 캐나다를 여행하는 미국인들도 여권이 있어야 된다니 사태가 더 악화될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 그 중에서도 이민와 시민권을 딴 사람이 많은 가주는 최악이 예상된다.
캐나다와 멕시코를 여행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여권을 지참하게 하는 것이 미국 안보에 얼마나 도움을 줄지는 모르지만 미리미리 담당 직원을 늘리지 않고 정책을 바꿔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친 것은 졸속행정의 표본이며 국경 없는 세계화 조류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여권과 비자 없이 세계를 여행하는 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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