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사회의 고질적 병폐중 하나가 ‘익명의 투서’이다. 투서는 말 그대로 드러나지 않은 사실의 내막이나 남의 잘못을 적어서 어떤 기관이나 대상에게 몰래 보내는 일이나 그런 글을 뜻한다.
역사를 보면 ‘투서’는 한때 힘없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힘 있는 사람들의 잘못을 고발하는 수단으로 장려되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 본성상 익명의 투서에는 음해와 무고가 끼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 때문에 좋은 취지로 시작한 이런 제도가 오래 지속된 경우는 별로 없었다.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배운 ‘신문고’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 초기 태종 때 설치된 신문고 역시 좋은 뜻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음해성 고발이 잇따르는 등 선용보다 악용이 많아지자 폐지됐다. 또 다른 조선조 투서제도의 하나로 ‘항통법’이란 것이 있었다. ‘항통’은 벙어리저금통처럼 생긴 대나무 그릇으로 백성들은 억울한 사연이나 고발 내용을 이 통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항통은 이 고을 저 고을 돌며 백성들의 투서를 받았으며 그 고을의 현감은 투서 내용을 근거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았다.
하지만 이 제도 역시 근거 없는 무고와 음해 때문에 오래가지 못하고 폐지됐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다산 정약용은 투서에 대해 “잘만 운용하면 좋은 제도이긴 하지만 갈고리로 남의 속을 긁고 음해하여 밀고가 끼어들지 않을 수 없으니 군자가 할 짓은 못 된다”고 점잖게 지적했다.
투서는 비겁한 행위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발할 때는 자신을 당당히 밝히는 것이 전제가 돼야 한다. 그래야만 그 내용이 설득력과 정당성을 지닐 수 있다. 하지만 거의 모든 투서는 얼굴을 감춘 채 익명으로 이뤄진다. 얼굴을 감추게 되니 근거 없는 ‘카더라’ 통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카더라’가 위력을 발휘한다는데 있다. 대부분의 기관들이 익명으로 이뤄진 투서는 무시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일단 투서가 들어오면 그 내용에 대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게 보통의 인간들이다. 그런 심리를 자극하자는 것이 익명 투서들의 노림수이다.
LA 경찰국의 한인 경관들은 한인타운 근무를 꺼린다. 이유는 투서 공포 때문이다. “한인 경관이 직책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운다”는 식의 투서가 종종 관계기관에 접수된다. 조사를 해 보면 예외 없이 음해로 판명나지만 당사자는 상처를 입을 대로 입은 후이다. 그러니 구설에 오르지 않으려면 아예 한인들 많은 곳은 피하려 든다는 것이다.
13기 LA 평통회장 인선을 앞두고 투서 고질병이 다시 도지고 있다. 총영사관이 2명의 후보를 추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투서와 진정서가 한국 평통사무처에 쇄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본국 일간지에도 대문짝만하게 실려 이래저래 LA 한인사회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다.
소위 한인사회 지도급 인사들이라는 사람들이 벌이는 이런 투서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특히 평화와 통일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단체의 관계자들이 내분과 분탕질에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은 부끄럽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투서는 군자가 할 짓이 못 된다”는 다산의 꾸짖음을 모두가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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