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톱 열풍이 한창이던 지난 1980년대 한 기업 신입사원 면접장에서 시험관이 한 지원자에게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 무엇이냐”고 묻자 “홍수처럼 밀려오는 고스톱의 물결”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의 사실 여부는 모르겠으나 고스톱이 유행을 뛰어 넘어 한국인들의 일상 속에 최고의 오락과 도박으로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화투와 고스톱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9세기 일본에서 도입됐다는 것이 가장 지배적인 설인데 이 주장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어차피 한국인들의 정서에 맞게 변형과정을 거쳐 토착화 된 놀이니까 말이다.
고스톱은 성질 급한 한국인들에게 딱 맞는 게임이다. 규칙의 개방성과 긴박하고 빠른 판의 회전, 아슬아슬한 승패의 갈림, 빨리 돌아오는 만회 찬스, 그리고 여기에다 바닥에 판을 깔고 벌이는 것 등 한국의 정서와 문화에 꼭 들어맞는 요소들이 많다.
그러나 고스톱을 서양의 포커 등 다른 문화권의 게임과 가장 두드러지게 차별화 시키는 것은 바로 ‘규칙의 개방성’이라고 생각한다. 포커는 수백년간 같은 게임의 룰이 적용돼 오고 있지만 고스톱은 치는 사람들에 따라 나름대로 규칙을 정할 수 있는 묘미가 있다. 이런 개방성과 가변성은 지난 수십년간 고스톱이 사회풍자의 도구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고스톱을 치다보면 다른 사람에게서 피를 받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상대방이 먹은 것 중에서 아무것이나 뺏어올 수 있는 것이 ‘전두환 고스톱’이다. 또 “믿어 주세요. 나 광 없어요”하면 언제든 죽을 수 있는 ‘노태우 고스톱’도 등장했고 광만 파는 사람을 ‘JP’라고 부른 것도 시대상의 반영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이 말썽피웠을 때는 이들의 이름 첫 자를 딴 ‘홍3 고스톱’도 등장했다. 이 고스톱은 홍단을 하면 다른 두 사람의 패를 다 먹고 그 뒤 3판까지 져도 돈을 안내는 역대 최고의 변칙 고스톱이었다.
그동안 등장한 풍자 고스톱만 수십 개에 달하는데 가장 최근에 등장한 것이 ‘이명박 고스톱’이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룰을 둘러싸고 이명박 후보측이 룰 개정을 반복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을 빗대 등장한 고스톱이다. 강재섭 대표의 경선룰 중재안에 반발한 박근혜측은 “지금 시중에는 이명박 고스톱이 유행”이라고 비아냥댔으며 박 전 대표도 “고스톱을 치는 중간에 룰을 바꾸는 법이 어딨느냐”며 반발했다.
그래도 ‘전두환 고스톱’은 일단 패를 돌리고 나면 룰은 바꾸지 않는데 ‘이명박 고스톱’은 화투를 치면서 자기가 이기는 게임으로 마음대로 룰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절대 질수 없는, ‘단군 이래 최강의 고스톱’이라고 이명박 후보 비판자들은 꼬집는다.
반발하는 가운데서도 박 전 대표는 타협의 필요성은 느꼈는지 이후보측에 “차라리 1,000표를 줄 테니 원래 합의된 룰로 경선을 치르자”고 제안했다. 상대가 룰을 바꾸려 할 때마다 피 1장을 줄 테니 원래 룰대로 치자는, ‘박근혜 고스톱’이 머지않아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고스톱은 사회상을 반영하는 거울이 돼 왔다. 그런데 최근 한국사회의 기류를 ‘고스톱의 사회학’으로 들여다보면 ‘진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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