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40년전인 1956년 1월30일. 결혼한지 2년 반, 생후 두달 된 딸을 돌보고 있는데 갑자기 굉음이 나면서 연기가 자욱하고 유리창이 산산조각이 났다. 누군가 집을 폭파하려고 현관에 다이나마이트를 던졌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는 않았다.
그리고 2년 반 지난 어느날. 남편이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고 가슴 조이며 뉴욕으로 날아갔다. 남편은 뉴욕에서 책 사인회에 참석 중이었는데 어느 정신이상 여성이 갑자기 편지 오프너로 그를 찔렀다. 날카로운 날이 대동맥 바로 옆에 박혀 제거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런가하면 그 다음해에는 애틀랜타에서 연좌농성을 하던 남편이 감옥으로 잡혀가 임신 6개월의 몸으로 사방에 탄원을 했다. 옥중의 남편은 “이것이 우리가 우리 민족의 자유를 위해 감당해야 할 십자가”라며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31일 타계한 코레타 스캇 킹(78) 여사의 신혼시절 경험들이다. 한 여자의 일생으로 보자면 그의 생애만큼 험난한 생애도 드물다. 민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아내로서 그의 결혼 생활 15년은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날아드는 폭탄에, 죽이겠다는 협박에 시달리며 살얼음을 딛듯 하루하루를 넘겨야 했다.
안전에 대한 위협 못지 않게 여자로서 괴로웠던 것은 남편의 바람기. 당시 킹 목사를 몹시도 싫어했던 에드가 후버 FBI 국장은 킹 목사를 바람둥이 공산주의 동조자로 보고 그가 묶는 호텔 방을 수시로 도청했다. 1965년 FBI는 킹목사가 야한 농담을 하며 바람 피는 현장을 녹음한 테이프를 코레타 여사에게 우송하기까지 했다.
이래저래 마음 고생 많이 시키던 남편이 암살된 것은 1968년. 홍차는 뜨거운 물에 넣어봐야 참 맛을 알 수가 있다고 했는데, 코레타 여사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마흔 갓 넘은 나이에 올망졸망 아이들 넷 데리고 살아갈 일만도 막막한 뜨거운 현실에 부딪치자 그는 오히려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인권운동가를 남편으로 둔 가정주부에서 인권 운동의 대모로 우뚝 섰다. 킹 목사가 인권운동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면, 그 업적을 지금처럼 온 국민이 기념하도록 만든 것은 코레타 여사였다.
그가 남편의 꿈을 이어 추진한 대표적인 사업은 두 가지였다. 마틴 루터 킹 기념 연방 공휴일제정과 킹 목사 기념센터 건립이었다. 60년대 후반 당시 이런 그의 계획에 대해서는 가까운 친구들까지 만류를 했었다.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코레타는 자기 집 지하실에서 시작해 오늘의 기념센터를 만들어냈고, 10여년의 캠페인을 통해 1983년 레이건 대통령이 킹목사 기념 연방공휴일 제정 법안에 서명을 하게 했다.
코레타 여사는 건강이 나빠서 입원하기 전까지 킹 목사 생전에 같이 살던 집에서 그대로 살았다. 남편과의 추억이 밴 집에서, 남편과 같이 호흡하며, 남편의 꿈을 이어가며 산 것이 그의 한평생이었다. 단순한 아내를 넘어서 남편의 정신적 동반자였던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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